분단사회의 종교와 개방사회의 종교
공존하는 의식 찾아야
타종교 용인 않는 한 분단적 종교 형태 존속
개방종교는 탈종교 교화의 종교를 의미
삼동윤리 사상은 닫혀진 사회를 여는 열쇠

1. 분단사회와 그 극복의 길
분단사회가 40년이 가까워 오고보니 철이든 사람이라면 하루빨리 달라진 점을 인정하면서라도 서로 만나 남북간 직접대화를 하자고 온갖 노력을 해왔던 것이 당연한 과업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표면상 대화를 주장하면서도 사실상 대화를 기피하는 사회가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그 이유는 40년간 한번도 그 체제를 바꾸지 않고 일인독재로 통제해온 조직이 분단의 건너편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분단적 의식구조 속에 자기에게 불리하면 대화를 기피하게 될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전 세계가 점차 밝아져 민주사회 공존 공화의 사회로 나가지 않으면 언젠가 인류역사속에 비판받게 될 것이고 자기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상대편을 이해하지 않는 한 대화는 불가능 할 것이 기초 상식이건만 이것을 기피하면서 무력 통일의 길만을 기다리려는 그런 사회가 있다면 민족의 장래를 위해 슬퍼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떻게든지 서로 대화의 광장에 앉아서 분단의 아픔을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는 양심을 찾아내는 것이 우리의 바램이라고 생각된다.
그러자면 기본적으로 분단적 의식구조를 놓고 열려진 시대에 공존하는 사고방식을 찾아내는 것만이 우리가 오늘날에 처한 사명이라 하겠다.
그러자면 기본적으로 분단적 의식구조를 놓고 열려진 시대에 공존하는 사고방식을 찾아내는 것만이 우리가 오늘날에 처한 사명이라 하겠다.
2, 우리편의 분단의식
그러나 분단의 저편에만 문제가 들어있고 분단의 이편에는 문제가 없는가? 결코 그렇게만 보고 싶지는 않다. 이편에도 분단의 의식구조가 허다히 많이 도사리고 있다.
지역간의 차별의식으로 지방경시, 서울편중의 사고방식이나 영호남의 지역감정도 일종의 분단의식이라 하겠다. 그러나 그것보다도 한국내 종교인들의 신념체계속에 분단을 조장하고 자기만을 존중하는 독재적 종교군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알았다.
7년전에 기독교가 98%로 있는 어느 환자촌에 봉사활동 하기 위해 교학대학 학생들과 함께 갔던 일이 있었다. 지방유지라는 점에서 그들 교회의 교역자들을 인사한 일이 있었다. 대체로 반가운 환영을 받았으나 그 중에 가장 영향력있는 교역자 한 사람에게 우리 봉사활동 eoy자들이 인사하려고 했었지만 좀처럼 응해주지 않았다. 우리는 끝내 인사를 청해 말을 건네었다. 그러나 의외로 여름이지만 앞뒤로 문 닫고 들어오라는 인사도 없이 문전에서 몇마디 나누었다. 그는 들어오라고 하는 말이 내키지 않는다면서 「타종교인과 대화하는 것은 영적인 간음이라」고 단정을 내린다. 이 말에는 더 이상 대화하려는 의욕마저 잃게 되었다. 상대자로 하여금 영적인 간음을 시켜서야 되겠나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이것을 신조로 생각한다면 이것이 어찌 남북한 분단한 것에 비할까보랴.
3. 분단사회의 존교와 그 극복
일찍이 토인비는 「21세기 이후에 역사가들은 세계역사를 기록할 때 공산주의와 자유주의의 대결을 중시하기보다는 기독교와 불교와의 신념상의 문제를 중시할 때가 올 것이라」는 말이 도리어 이해감직 하다.
그러나 기독교인이라고 모두 그런것은 아니리라고 믿는다. 가령 카톨릭은 타종교와의 대화의 문을 열고 있으며 개신교에도 모두 그러지않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사도행전 4:12에 「다른이로서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라고 한 베드로의 설교에 따라 「교회밖에 구원이 없다」라고 한 명제가 살아있는 한 자기종교 중심의 담은 높이 쳐있고 타종교 경시의 신념은 여전할 것이라고 보아진다.
포 틸리히가 종교인의 「궁극적 관심」을 제창한 것은 분명히 타 종교의 어느 누구에게서나 서로 만나게 하는 장을 구축하는데 높이 평가할 수 있다. 그 신념체계가 타종교를 용인하지 않기 때문에 분단적 종교사상은 계속 존재할 것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자기만을 드러내는 분단적 종교는 인간의 구원을 줄 수 있는 힘이 상실되어지는 것은 지난날의 역사가 증명한다. 이런 점에서 분단적 종교형태에서 개방적 종교형태로 해방할수 있는 능력을 길러야만 하겠다. 여기에 대해 공존적이며 개방적 종교가 지향하는 길은 무엇인가를 이해해보자.
4. 개방적 종교의 방향
개방적 종교를 다른말로 표현하면 탈종교화의 종교를 의미한다. 지난날 자기종교 종파만을 종교의 지상진리로 보고 남의 종교는 종교로서의 의미가 없다고 보아왔던 종교적 도그마와는 달리 타종교도 동일하게 공존하는 이해관계로 보는 사상이 그것이다. 이것은 비록 자기가 처해있는 종교적 위치와 비중은 특별한 위치라고 본다하여도 자기의 도그마에 매이지 않고 남의 종교도 소중히 이해하는 종교적 윤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일찍이 우리 국토가 삼국으로 분단됐던 시대가 있었다. 그 중에 외국의 사상적 영향권을 가장 늦게 받을 수 밖에 없었던 신라가 신라적인 것만을 고집하지 아니하고 당시 이웃인 고구려나 백제의 인재를 국한없이 활용하였고 또 그들의 종교관도 어느 종파에 국한을 두지 아니했다. 원광법사가 화랑들에게 내린 세속오계는 불교적 국한을 뛰어넘은 유교적 충효사상에까지 역점을 두엇꼬 원효의 아들 설총은 원효의 영향을 받아 공부해야 할 사람이지만 불교가 아닌 유교적 사상의 대가가 되도록 하였던 생각은 분명히 한 생각 크게 열려진 종교인의 모습에서만 이해할 수 밖에 없는 개방적 종교인의 사고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러므로 최치원은 화랑의 인간성을 논하면서 혹은 유교인 같고 혹은 불교인 같으며 혹은 도교(선도)인 같은 사상은 그 주체가 다분히 한국적 주체가 서진 바람직한 인간성이어서 마침내 삼국통일의 큰 과업을 성취하고야 말게 했다고 보았던 것은 분명히 탁월한 역사관이었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반대로 쳔여년간 신앙해온 불교를 송두리째 비판하고 유교사상을 통해 立國했던 조선조는 척불의 칼날이 마침내 自敎에게 돌아가 명분만을 내세우면서 소위 골육상쟁의 연속으로 사화의 악순환만이 계속하게 하였다.
이 역사적 교훈은 분단사회 속에 살고 있는 오늘날에 우리에게 중대한 과제로 보고 그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는 종교인이 되어야만 하겠다. 오늘날 단일종교로 세계통일 한다는 생각은 종교를 통해 식민지를 건설하려했던 1900년 초에 있었던 망상으로 2차대전을 종결하면서 이미 끝났던 생각이다. 더욱이 1916년 소태산 대종사가 교단의 문을 연 역사적 의의가 또한 여기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교법총설에 보면 각종 각파로 분립된 종교인들은 자기종교인들 간에나 타종교인들 간에 본의아닌 싸움의 연속을 발견하고 이것을 지양하기 위해서 우리 새 종교가 시작되었음을 역설했던 것이 이 때문이다. 이것은 남북한 분단사회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이오 우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있어야 할 과제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궁극에 서로 하나로 만날것을 예상하면서 종교인간에 화동하는 윤리는 원불교 삼동윤리 사상에서 익히 제창하는 길이다. 이상의 삼동윤리 사상은 개방된 사회속에 종교인 누구나 한 가지 상식적인 사상이 되어야만 굳게 닫힌 분단의 열쇠는 열릴 것으로 믿는다.
<원광대 교학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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