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표어 ― 「현대화를 다지는 언론」

7일은 제28회 신문의 날이었다. 우리나라 신문이 「신문의 날」을 제정한지 금년으로 28년이고, 작년에 그 1백주년을 맞았었다. 금년 신문의 날 표어는 「현대화를 다지는 언론」이다. 돌이켜 보자면 우리나라 신문제작이 아직도 제1세대의 차원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제사 현대화의 명제를 내걸게 된데 대해서는 시기적으로 매우 때늦은 감이 없지도 않지만 그것은 이제부터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유수한 신문들은 한국신문사상의 획기적으로 그 신문제작에 있어서 고도의 현대기술을 도입하여 기술혁신을 이룩할 채비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 기업으로서도 대단한 성장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리하여 신문제작의 제1세대를 과감히 청산하고 제2 또는 제3 세대의 전망을 가늠하는 터전도 마련되리라는 기대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근간 우리 신문들은 그 신문자체의 통념상의 내용이나 편집상의 품위에 있어서도 매우 다양하고 진지한 노력을 기우리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현대는 「편집 저널리즘의 시대」라고 할 만큼 신문편집 제작상의 기본원리에서 활자 조정의 미학과 사진의 입체적 감도등 관심은 날이 갈수록 달라지고 발달하여가는 취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의 신문들은 활자의 확대와 단수의 조정, 또는 가로쓰기등 여러면에서 잘 읽히는 신문으로 독자의 신문으로서의 최선의 기능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인데 우리 신문의 편집 제작상의 방향이 그 정형율이나 기본정착성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 것이냐 하는 문제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을 수 없고 동시에 이러한 신문제작의 풍조가 혹은 유행가적 가락으로 흐르지 않기를 바라면서 이를 조심스럽게 지켜보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나가는 한 떨기의 양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신문편집 제작상의 현안이 돼 있는 세로쓰기니 가로쓰기니 하는 문제에 있어서도 정당한 주체적 가치기준의 판단이 내려져야 하고 원리적 근원적 합리적 보편적 연구의 과정이 선행되지 않은채 다만 전통성에 매어 있거나 서구문명의 추세에 추종하는 따위의 태도로 모방성 유행성에 집착하는 것은 선진문명인의 바른 자세라고는 볼 수 없다. 가로쓰기나 세로쓰기가 일견 단순한 일인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 문화성의 독자성과 종합적 가치의 궁극적인 척도를 보여주는 일면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시대착오를 범해서도 안되게 물량화와 저급화 추세의 대중문화에 휩쓸려가는 것이어서도 안된다.
신문현대화의 명제속에는 신문 제작상의 최고로 발달된 훌륭한 기능을 개발 도입하는 것도 당면과제이겠으나 동시에 이에 못지않게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성숙한 그 인격이며 가치관이다. 성숙한 품위 그 성숙한 태도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그것은 말할것도 없이 성숙한 인격에서 오는 것이다. 우리는 5천년 혹은 6천년의 유사시대, 역사시대를 살아오고 이끌어 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저마다 우리들의 안에는 그렇게 이미 성숙돼 있는 진리와 생명의 역사가 살아있다. 여기 현대신문이 끊임없이 추구하고 성취해야 할 성숙한 품위와 가치관이라는 것이 다름 아닌 바로 이렇다 할 실체들이다.
흔히 현대를 전통주의의 반대개념으로나 이해하려고들 하고 있다. 사실 현대는 단절된 저 시대도 어느 과도기도 아니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동시적으로 아우러져서 살아가고 있는 삶의 총체적인 현장이다. 이와같은 삶의 총체적인 현장으로서의 신문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과연 이 신문의 세계적인 사명은 막중한 것이다. 「현대화를 다지는 언론」의 주제가 어찌 이 나라 신문의 제2 혹은 제3세대의 기술혁신을 지향하는 구호로만 그칠 일이겠는가. 그 언제 그 어디서나 언론이 이룩해야 될 그 궁극적인 뿌리는 「비판정신」이다. 성숙한 인격의 바탕이 아니고는 세계와 일체생령 그 전체를 바로 보고 수용할 수 없다. 비판정신 곧 「진리정신」이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