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 영 봉 <수위단원 ㆍ 미주동부교구장>
미주교화 발전에 헌신
원광한국학교 개설 2세 교화기여
유치원과 유료양로원 설립이 과제

美대륙이란 광활한 벌판에 서서 미주교화의 한 초석임을 다지며 한 알 두 알 밀알을 심어 가꾸듯 오직 중생구원의 신념으로 봉공하시는 승타원 송영봉 동부교구장님.(61세)
풍속과 문화, 민족성, 가치 등이 다른 곳에서 일원의 법음을 전하려는 사명감 하나로 강산이 변한다는 세월을 넘기셨다.
여기에 교화와 교육의 장을 열기까지 어떤 과정 속에서 오늘을 이루셨는지ㆍ 숨은 애로와 전망을 알아본다.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그 당시에 어떻게 해서 해외교화에 나서게 되셨는지요?
▲원남교당에서 근무한지 만 9년 되던 해였습니다. 때마침 백상원 교무가 귀국하여 뉴욕교화를 위해 합력해 달라는 말을 듣고 판단이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해외 교화자로서 나 자신을 돌이켜볼 때 어느 것 한 자격이 갖추어 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그렇지만 상원 교무의 의견을 일축할 수가 없어 종법실에 가서 품의를 드렸습니다. 종법사님께서 「어린 사람이 애를 쓰고 있으니 한 2년 살고 오너라.」하시어 명을 받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결정을 하고 보니 당장 비행기 표 값도 없었고, 뉴욕교당의 창설이란 과제도 있고 해서 대한항공 점보기가 첫 출항할 때 무료 운행하는 기회를 맞추어 맨손으로 건너갔습니다.
―뉴욕교당이 창설되기까지의 상황을 듣고 싶습니다.
▲내가 출국하던 해가 원기 60년 5월이었습니다. 어려운 일이란 걸 각오는 했지만 막상 현장에 당도해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국내 교당이나 교단에 기대는 것은 엄두도 못내는 실정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지요. 숙소라는 곳에서 창문을 열고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온통 검은 사람뿐이어서 그 누구도 찾아오려고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산 법사님 모시고 집을 구하려고 다녔고, 겨우 창고 같은 집을 세 얻어 법신불 모실 곳만 수리를 하였습니다.
나 자신 육신이 멀쩡하면서도 말할 수도 들을 수도 읽을 수도 없어 가만히 집만 지키면서 식생활을 위해 상가 점원 노릇을 하는 상원교무 만을 기다리는데 마치 심 봉사가 심청이 내보내 얻어먹는 심경이었습니다.
언젠가는 귀가하는 상원교무를 맞이하러 아래층에 급히 뛰어 내려가다가 방 열쇠를 놓고 나와 문이 잠기는 바람에 전기제품이 가열되어 화재 날까봐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얼마를 지났어도 잊혀 지지가 않습니다.
―그렇듯 어려운 처지에서 어린이 교육도량을 마련하시는 등의 성과를 거두고 계시는데 어떻게 그 매듭을 풀어 교하로 연결하셨는지요?
▲요즈음 국내에서도 초창기에 교당 건물이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압니다. 더구나 미국사회에서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몇 번 법회에 나오다가는 안 와버리고 해서 일구월심 집을 마련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온갖 노력으로 집을 사서 봉불식을 올리려는 찰나에 사기를 당해버렸죠. 허망하고 답답한 심경은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뒤로 국내 여러 호법동지님들의 후원을 얻어 집을 계약했는데 환율이 뛰어 예상액을 훨씬 넘어버렸습니다. 우리는 다만 법신불전에 매달렸죠. 진리의 도우심을 얻어 어렵게 집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그토록 어려움 속에서 어떻게 「원광한국학교」와 「심원훈련원」을 설립하셨는지요?
▲교로들도 외국에서의 생활에 직면하고 보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래서 2세 교화로 뿌리를 내리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판단하여 6년 전에 또 다시 맨주먹으로 시작했습니다. 교로 사회가 부모자녀 사이의 갈등과 가출하는 사례로 심한 진통을 앓고 있어 이 문제들을 해결하고 한국魂을 심어주면서 인간이 걸어가야 할 도리(진리觀)를 심어주는데 교육의 목표를 삼았죠. 그래서 이오은 교무를 오도록 했고, 눈물이 나도록 가혹한 시련을 겪으며 외국인과 함께 정규코스를 밟아 교사자격증을 취득하게 했습니다.
처음에는 교도자녀를 중심하다가 기독교 아이들까지 원에 따라 받아들여 여름에는 전문적인 합숙훈련을 시켰고, 일요일에는 어린이 법회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역시 장소문제로 제대로 교육과 훈련이 안 되었고, 임시 집을 빌려 진행하는 것을 본 교도들이 자극을 받아 교당을 증축, 교육관과 학생관을 마련했습니다.
심원훈련원은 현재 국제교화사업회장님이신 박심원(원남교당)님께서  자주 내왕하시며 보시고 뜻을 내어 원기 69년 2천 평 대지에 90여 평의 건평을 포코노산 중턱에 세웠습니다. 어린이 합숙훈련과 일반 및 청년들의 수양官으로 활용하지요. 뉴욕교당에서 차량으로 2시간 30분 거리입니다.
―그동안 모든 역경을 딛고 오늘의 교화 場을 이루셨는데 보람은 어떤 것이며 앞으로 계획과 교단에 바라시는 점에 대해서…
▲무엇보다도 재직하고 있는 교역자들이 일심합력으로 소임을 다하고 있어 더 바랄 것이 없고 교도들도 하나로 뭉쳐 매주 법회에 평균 50~60명 참석하고 신정절 때는 1백 명까지 나옵니다. 그리고 원광한국학교 설립으로 자기 이름을 불러도 모르던 아이들이 말하고 노래하고 연극발표도 하는 것을 보면 부모들과 함께 더 없이 기쁘죠.
아이들은 학교과정에 그쳐서는 안 되므로 태조사를 시켰습니다. 계문을 주고 각자 지갑을 주어 저녁에 점검했는데 이렇게 교리를 활용해서 교육하니까 어른들보다 빨리 파악했습니다.
특히 외로운 타국생활을 하시는 노인들은 남녀 따로 합숙훈련을 해 삶의 보람을 찾도록 해 드렸지요. 남자교도들의 발의로 청운회를 조직했고, 학생회 ㆍ 청년회도 결성하여 계층별 교화체를 구성한 셈입니다.
그러나 미주교화는 아직도 까마득합니다. 차후 서서히 전파되겠지만 현재 워싱턴과 필라델피아를 계획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는 유료양로원을 생각합니다. 집만 한 채 있으면 외롭고 의지할 데 업는 사람들을 모아 수양도 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아직 양로원이 교포사회에 없습니다. 그리고 유치원을 했으면 합니다.
교단에 바라는 것은 적어도 집이 마련되고 교무를 파견했으면 하는 생각이고, 심원훈련원과 원광한국학교가 엄연히 공공기관인데 주소록에는 기타 사항으로 있어 시정을 바랍니다. 앞으로 이 두 기관이 단독 운영체가 되어야 하니까요.
멀고도 먼 미국에서 낮선 이방인의 냉엄한 가슴에 온정을 심어주고 한국魂과 진리적 신앙으로 삶의 의미를 일깨워주는 교화자로서 수행인으로서 걸어온 12년, 승타원 법사님의 인고의 세월이 겹겹이 아지랑이 속에 피어오른다.
[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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