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이 병들었으니

근래에 우리 교역자의 건강이 매우 저조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교역자의 건강상 여러 문제는 이제 새삼스런 것이 아니고 그동안 알게 모르게 걱정을 해오고 있다. 무슨 통계나 조사에 의해서라기보다도 우선 가까이서 지켜보는 것만 해도 입원환자수가 사시사철 끊이지 않는다는 상황에 접하게 된다.
우리들이 한평생을 살아가는데 어찌 한결같이 건강하기만을 바랄것인가. 더구나 생로병사라는 업륜속에서 살아가는 일종의 생물학적인 생리와 구조를 지닌 존재로서 어떻게 그렇게 완전무결하기를 그 누구인들 탐구하겠는가.
초창교단의 시절에 비하여 우리 교역자의 수효가 양적으로 많이 증가되었다는것도 사실이고 이에 수반하여 교화공동체의 영위와 복잡미묘한 교역의 수행과정에서 적지않은 건강상의무리가 빚어지고 정신적 육체적 고행의 결과는 묻지 않아도 자명한 현실로 여울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 교역자로서 환자일 경우, 물론 극히 적은 수이지만 병의 원인이나 병의 뿌리, 환후 증세도 가지가지일 수 밖에는 없고 신체적으로 아주 위험한 대수술이 없는것도 아니다.
전문인이 아닌 처지에서 건강이나 질환의 문제를 가지고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우리 교역자중 4 ㆍ 50대 중반기 이후의 층으로 내려갈수록 일반적으로 건강상태가 저조를 띄는것과 교역자 전무출신의 생명 수한이 평균연령 70고개를 넘지 못하고 있는 현상을 놓고서 문제가 없다고 넘길 수 있는 것이 아닌것은 말할것도 없다.
대종사를 비롯하여 정산 삼산 주산등 초기교단 여러 선사 선진께서는 40대 50대에서 겨우 60대를 넘거나 넘기기 어려웠던 것은 다 아는 일이고 원기 60, 70년대 이후로는 차츰 상승추세를 보여주고 있는 것은 교단을 위하여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니다.
주어진 생명으로 하여금 그 목숨을 산다는 것이 일체중생이 누구나 다 스스로 하는 노릇인데 무엇이 그다지 대견하고 장할것이야 있겠는가만은 낳고 늙고 병들고 죽고하는 이 보편적인 자연법칙 자연현상이 우주적인 자연의 순환 그대로 생명의 원리 그대로 인위적으로 어떠한 이데올로기나 현대문명의 이기로도 역류하고 차단하고 조작하는 일없이 서로서로의 삶의 환경이 공동체로서의 순리와 조화의 흐름을 열어가는데서만 우리 모두는 거기에서 비로소 건강한 모습을 찾게 될 것이다.
교역자의 건강이나 건강부진의 이런저런 사유가 반드시 교역자 개인이나 교단과 교화공동체 자체의 구조적인 환경의 삶속에서 제일주의적 원인이 일고 있는 것은 말할것도 없는것이지만 보다 궁극적으로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중생공동체의 아픔이며 다같이 얽히고 설킨 공업의 업장인것을 어떻게든 저버리지 못한다.
중생이 병들었으니 나 또한 병(衆生病故吾亦病)이라고 한 말이 이제와서 별스런 소리야 아닐지라도 이 시대와 중생의 아픔으로 하나가 돼버린 삶속에서 이 병과 이 건강이 기쁨으로 재생되고 보람으로 이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우리 교단은 이 시대와 이 병에 대응해서 제생의세의 대도와 아울러 지역사회에 유수한 교립대학병원등 종합적인 대규모의 의료시설을 갖추고 있고 따라서 정신병 육신병을 대치하는데 종전에 비하여 비약적인 편의를 제공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온갖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교역자가 단순한 개인인가. 그 병은 지금 우리들이 다같이 앓고 있다. 일체중생이 개벽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데에서 나의 병 나의 건강은 더욱 참되고 새로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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