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천년(三千年) 기다린 터 · 영산성지(靈山聖地) 4

■  영산 학원실

영산 학원실은 영산원과 더불어 영산을 건설할 당시에 지어진 건물이다. 영산 학원실은 원기8년(1923) 10월에 옥녀봉 아래 있었던 원불교 최초의 교당인 영산원을 현 위치로 옮기면서 8칸 건물 2동을 건축할 때 지어진 8칸 ㄱ자형 우진각지붕 건축물이다.

학원실의 건축 형태는 일제 치하에 지어진 집이라 그런지 약간의 일본식 주택 형식을 띠고 있으며, 전통 목구조와 개량된 한옥의 모습으로 이루어진 건축양식을 지니고 있다.

학원실은 원기8년에 건축 된 이후에, 원기12년에 영산과 인근 남녀 청소년들의 교육을 위하여 영산학원을 설립하면서부터 학원생들의 교실과 숙소로 사용되어 청소년들의 교육과 더불어 원불교 초기교단의 인재 양성기관이었다.

원기31년(1936) 영산 대각전이 건축되기 전까지 영산 지역의 원불교 교도들의 집회 장소 겸 법회 장소로서 기능을 하였으며, 1956년 정관평 재 방언공사인 간척사업이 시작되자 학원실 북쪽을 방언공사 사무실로 3년간 사용하였으며, 1974년 원광원이 건축되어 교실과 숙소가 현 선학대학교로 옮기자 학생들의 동아리방과 학생회실로 사용되었다.

영산 학원실에 대한 문헌자료

〈월보〉 제37호(원불교 초기교단 기관지)

시창17년(1932·壬申) 6월 불법연구회(원불교 임시교명) 총부 발행.

영광지회 참 무엇보다도 영광의 명물은 영산 학원단들이다. 그들은 순진한 농촌의 소년들로서 반독반경(半讀半耕)을 하는 중인대 일도 썩 잘하고 공부도 썩 잘하고 창가도 썩 잘하고 밥도 썩 잘 먹고 몸도 썩 튼튼하야 씩씩하고 활발하기 짝이 업는 자들이다.

끝끝내 잘 진행한다면 장래에 어떠한 큰 인물이 될란지 몰은다. 그러나 자랑 끝에 쉬 실는다고 개살구가 모로 톡 터질른지도 모르지마는 하여간 현하(現下)의 태도만으로난 퍽 근실하나니 그 성명은 조희열, 이상행, 정학선, 이중행, 이도수, 이건창, 오효종 등.

〈월보〉 제44호

시창18년(1933·癸酉) 정월호 불법연구회 총부 발행.

일기담본(日記膽本) 일즉이 우리 영광의 자랑으로 本誌上에 보도된 영광지부 소년단의 존재는 독자 제씨도 응당 잘 아실 듯 함이다.
그런대 그들은 20 미만의 어린 사람들노써 晝耕夜讀을 躬行實踐하며 夏作冬禪으로 열심 공부중인데 그 信誠이 날노 구더지며 意向이 점점 高尙하야져서 이와갓치 前進不退한다면 장래에 엇더한 큰 인물들이 될는지 몰을 사람으로 하여곰 多大한 囑望을 가지게 함이다.

이에 그들의 매일 일기하는 중에서 눈에 띄이난 대로 2, 3건을 소개하오니 비록 文章의 美난없다 하겟으나 그 진실한 의미로써 可觀할 점이 없지도 않다고 생각함이다. (記者)

편집자 주 -일기전문 생략-

▲ 소실되기 전의 이씨재각.

■ 이씨재각(李氏齋閣)

최초 법어가 설해진 이씨재각에 대해 교사에서는 '대종사, 안으로 모든 교법을 참고하신 후 다시 밖으로 시국을 살펴보시어, 정신도덕의 부활이 무엇보다 시급함을 느끼시고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제창하시니 이것이 곧 개교표어다. 대종사 다시 시국에 대한 감상과 그에 따른 새 세상 건설의 대책을 최초법어로 발표하시니, 곧 수신의 요법, 제가의 요법, 강자 약자 진화상의 요법,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소태산 대종사에 의해 최초로 행해진 대중 설법으로서 최초법어가 설해진 시기는 정산종사에 의해 기록된 〈불법연구회 창건사〉에 시창 원년에 설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씨재각이 있는 돛드레미는 현 행정지명 상으로는 길룡리 구내 범현동 마을이다.

26세의 젊은 대종사가 길용리에서 일원의 진리를 깨달았지만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가 없던 시기에 팔산 김광선 대봉도의 주선으로 이씨재각 일우를 빌려 의지하면서 최초법어를 설했다고 한다.

이씨재각이 위치한 돛드레미가 원래 이름인데, 돛드레미의 뜻은 장다리봉 아래에 위치한 마을 앞 여울에서, 선진포와 강변나루에서 흘러나온 돛단배가 대뜸 골바람을 맞받아 팽팽하게 돛을 드리우고 구수리 소드랑섬을 경유하여 법성으로 빠져나간다 하여 '돛드레미'라는 이름이 생겼다.

범현동이라는 이름은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편성되면서 돛드레미가 변하여 범현동이 된 것이다. 대종사께서 최초법어를 설하셨던 이씨재각은 1995년 전기누전으로 완전히 소실되었다.

남아있는 사진으로 보아서는 1995년 당시에는 두 채의 재각이 있었으며, 팔산 대봉도가 기거하던 터 바로 밑에 위치했던 원래의 이씨재각은 소실되었고,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경우에 나중에 지어진 이씨재각을 원래 대종사께서 최초법어를 설하던 재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 영산성지 구내. 왼쪽으로 대각전이 보이고 영산원과 영산 학원실 법모실이 돌담장 안에 모여 있다.

■  법모실(法母室)

법모실은 원기8년에 옥녀봉 아래 있었던 영산원을 현 위치로 이축(移築)하면서 8칸 2동을 건축하였다. 이 후 1924년 초 간척답인 정관평과 기타 지역의 농사와 관련된 4칸 창고로 건축되었다.

원불교 제2대 종법사 정산 송규(종법사 재임 1943∼1962) 일가족이 1924년 말 창고를 개조하여 2칸을 사가로 사용하였다.
1949년 정산종사 일가가 익산으로 이사한 후 창고로 사용하다 1959년부터 3년간 대산종사가 기거했다.

1963년부터 영산선원 원장의 숙소로 사용하다가 그 후 영산 선원생들의 기숙사와 우리나라 최초의 대안학교인 영산성지고등학교의 기숙사로 사용되었다.

이 집은 원불교 제2대 종법사인 정산 송규의 사가로 사용되었던 집이라 하여 '법모실(法母室)'이라 이름한다. 법모실은 건축 당시 초가 지붕이었으나 관리상의 문제로 아연지붕으로 개량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산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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