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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역정기(164) 대산 김 대 거 종법사편(11)
구도역정기(164) 대산 김 대 거 종법사편(11)
  • 원불교신문
  • 승인 1987.06.26
  • 호수 4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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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하사품
대종사께서 내려주신 마지막 구두 한 켤레

그러나 초창당시의 총부생활은 말할 수 없는 궁핍한 생활이었다. 일제치하의 시대적 상황도 그랬지만 창업의 역사를 가꾸어 가는 과정이었으므로 더욱 어려웠던 것이다. 그래서 한 때는 여자 전무출신들이 공부를 중단하고 고무신 공장이나 제사공장에 다니기도 했다. 남자들 외출복은 양복 한 벌을 걸어놓고 서로 교대로 일 있을 때면 입고 나가는 공동양복이었다. 그래서 몸에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였지만 그런데에 관심을 쏟을 만큼 정신적으로 육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여유가 없었다. 외형적인데 꾸밈보다는 안으로 부처 이루려는 신념들로 가득했기 때문에 아무리 어려운 교단현실에 직면해도 물러서는 일이 없었다. 오늘에 돌이켜 생각해 보아도 길이 이어나가야 할 해맑은 정신인것 같다.
대종사님은 별로 칭찬하시는 일이 없으셨는데 원기 26년 게송을 내리신 다음부터 여러사람들을 추어주셨다. 그리고 열반하실 무렵에는 선물도 주셨다. 그동안 아무것도 주신 일이 없었는데 갑자기 나를 보시더니 『너 가져가거라』하시며 커다란 구두 한 켤레를 주시는 것이었다. 내 발은 작아서 맞지도 않는 신발이었다. 그렇지만 처음이자 마지막인 대종사님의 귀한 하사품이었다.
내가 감사부장하던 원기 26년의 일이었다. 그때 모인을 교단적으로 징계하려고 했다. 드디어는 교단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의견을 모으게 되었다. 대종사님께서도 그분에게 가차없이 꾸중을 하시고 나가라고 야단을 치셨다.
그러나 막상 대중들이 그런 여론을 일으키니까 『내가 그 사람을 경계하려고 그러는데 너희들은 쫓아내려고 야단이냐?』
어찌 한 생령인들 버리실 수 있었겠는가? 자비의 너른 방편을 알 수 없는 우매한 중생들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 실천하려는 어리석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깊고 넓은 성현의 뜻을 알리없는 우리가 얼마나 답답하셨을까? 두고두고 큰 교훈으로 새겨져 있으며 그래서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 물러섬은 모르지만 여기에서 나가라고 물리칠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세월을 누가 무상하다고 했던가?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아웅다웅하며 사는 사바세계에서 나는 어쩌다 변 ㆍ 불변의 진리를 알아 허망한데 떨어지지 않고 값진 삶을 살 수 있게 되었는지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진리적 생활을 할 수 있게 해주신 분은 나의 할머님(노덕송옥)이셨다. 그런데 육신의 쇠함에는 어쩔 수 없는 법. 일흔다섯이라는 연세로 원기 18년 열반하시게 되었다.
나의 할머님은 이 회상에 귀의하신 후 스스로 낙도생활을 하시면서 전가족을 입고시켰고 집에 교무를 모셔다가 법회를 열어 교당창설의 초석을 다지셨다. 오로지 이 공부 이 사업외에는 다른 생각이 없으셨던 할머니께서는 차를 탈 때에도 걸어다니시며 푼돈을 모아 교단사업에 협조하셨고 철저한 법규실행으로 모범을 보이셨다.
원기 13년 제1대 제1회 총회시에 할머님은 희사유공인의 성적표를 봉수하시었고 열반후 원기 38년 4월 26일 제1대 성업봉찬회 때에는 공부등위 정식법마상전급에 사업등급은 정4등으로 원성적 중3등이 되어 78명중 33호에 해당되셨다.
혜산님은 다음과 같이 할머님 돌아가심에 대해 추모했다.
「.....종사님에게 향하심 그 믿는 마음과 정성 어찌 다 말하리요. 오직 하늘에 사무치고 땅을 꿰었다할까. 아아 과연 선생은 거짓없는 참 인간이시며 자비하신 보살이실진저 공부에 대하신 그 마음 사업에 대하신 그 성의 동지를 아끼시는 그 밖에 과연 여성계의 모범이시며 나아가 일반 인간의 스승이실진저. 진안과 본관 사이가 근 이백리의 산하건마는 자손들이 올리는 여비등속은 본회 사업에 보태기 위하여 칠십노경에도 불구하시고 차한번 타지 않고 전부 도보로 왕래하시며 게다가 본관 대중들을 생각하사 등에다 떡 과실등 음식을 장정으로도 한 짐이 될 것을 지고 오시니 그 마음 과연 어떠하시며 그 정성 과연 어떠하시다 할까....」
생각할수록 나는 복이 많았다. 이런 할머님을 연원하여 출가서원을 올리게 됨은 보통 인연으로는 안될 소중한 인연의 만남이었던 것이다. 내가 전무출신하기까지에는 많은 생각들이 오고갔지만 일단 서원을 올린후로 나는 단한번의 갈등도 없었다. 오직 깨달음을 위한 생활이 있을뿐이었고 그래서 출가한 3년뒤인 원기 17년 나는 그때의 심경을 「立志詩」란 제목으로 쓰기도 했다.
此身 必投公衆事 永世盡心 竭力行, 人生出世 無功績 斯我平生 何免愧(이 몸은 반드시 공중사에 던지리니 천만년을 가더라도 몸과 마음을 이에 받쳐 행하리라. 인생으로서 출세하여 공적이 없이 죽는다면 이내의 평생에 어찌 부끄러움을 면할손가?)
이렇듯 수도생활에 하나하나 중생의 껍질을 벗기려는 몸부림을 하면서 한해 두해가 지나갔다. 인생의 참 의미를 찾으며 구속과 욕망의 늪을 헤쳐 편안하고 자유롭고 싱그러운 그 본래 면목을 찾아서 주야를 매달린 것이다. 시작도 없고 끝도 dqjt는 진리를 갈구하며 내면의 어지러움을 정리해 나가는 수행만이 쉬엄없이 지속되어야 한다.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은 나에게 더없는 소중한 내용들로 채워져야 했다. 앞을 보아도 뒤를 돌아보아도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한다해도 이 걸은 이대로 대종사님의 지도와 훈증으로 새 인격을 갖추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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