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인간은 자기의 내면을 깊이 파고 들면 들수록 자기는 아무 가치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가장 겸허하게 자신을 조명하는 시간만큼은 가진 것도 갖춘것도 없는 텅 빈 그래서 허망한 삶을 느끼게도 한다. 어쩌면 지극히 순수한 종교적 본질에도 다가서는 출발일지도 모르는 이 자성의 순간은 또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보다 참되고 보람되고 희생과 헌신으로 생애를 불사르리라는 강한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진실일 것이다.
▲어느 벽지교당 교무가 한때 허무와 좌절로 도저히 헤어날 수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있었다. 그 교무는 그동안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다고 자부를 해왔고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을 통해서 적어도 교역자로서 양심에 가책을 받을만한 일이 없었다. 수도인의 일과를 어김없이 지켜 나갔고 교화의 활성화를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항상 푸르른 희망과 사명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자신은 인사기가 돌아와도 일급지 이급지 교당을 선별, 의견을 인사당국에 개진해 본 일도 없이 발령장 하나에 짐을 꾸리고 석장을 옮겼다.
그러던 그 교무에게 「산다는 것이 무엇이며」「무엇을 위해 일해야 하고 공부하는 것일까」라는 궁극적 물음에 스스로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이처럼 가혹한 시련은 얼마동안 진행되었다. 새벽 5시가 되어도 종을 울리고 목탁을 치며 좌선을 해야함에도 도저히 손발이 움직여지지를 앉았다. 실오라기 하나 잡을 수 없을만큼 탈진 상태에 빠졌다.
이렇듯 허무의 늪에서 약 1개월의 시간이 흐른 뒤 침묵속에 떠오르는 「뿌리깊은 나무는 흔들리지 않는다」라고 하는 또 하나의 내면의 소리를 듣고 소스라쳐 일어서게 되었다. 그동안 깊은 뿌리가 내려졌다고 하는 스스로의 착각에서 벗어났다. 비로소 그 교무는 신앙을 위한 신앙, 수행을 위한 수행을 하는 수도자의 허상에서 벗어나 신앙과 수행의 본질로 다가서는 새로운 신념을 구축하게 되었고 그 시련을 넘어설 수 있게 되었다.
누가 이 교무에게 잘못했다고 돌을 던질 수 있겠는가.
인생을 사는동안 넘고 겪어야 할 태산과 계곡이 많다. 자기에게는 아직 그런 시련이 다가오지 않았다 하여 질타를 가할수는 없는 일, 뿌리깊어 어느 태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튼튼한 나무로 성장하기를 서로 촉구해야 할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 허물을 저질렀을 때 그 경중을 가리기에 앞서 모두가 뼈를 깎는 아픔으로 참회하고 스스로의 가슴을 열어 성숙한 인격을 이루는 계기를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냉철한 판단력으로 현실을 직시할 지혜를 갖추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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