藥大, 시련의 출발
전국 약사회에서 취소투쟁위원회 결성

 무슨일이든지 새로운 변화를 가져 오려면 진통을 겪기 마련이다. 대학이 후기에서 전기입시로 바꾸는데에도 상당한 애로가 있었다. 나는 그만한 진통은 있으리라 예상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교수들과 교직원들을 설득했다.
 『우리가 전기로 바꾸는데에는 그에 따른 어려움이 있을것으로 생각된다. 설사 1~2년의 공백이 있다고해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넘어야 할 과정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한다.』
 그리고 전북권 고등학교를 순시했다. 이해와 홍보를 하며 만일의 경우에는 모든 것을  책임짓겠다고 하며 고등학교 교사들과 대화를 했던것이다. 그러나 고등학교 교사들 마저 반대하고 나섰다. 전북 지역에 종합대학은 2개 뿐인데 동시에 지원해서 떨어지게 되면 아이들만 피해를 보게된다는 것이 반대 사유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신념을 가지고 추진한 결과 전기입시로 바꿀수 있었다.
나 역시 첫 입시가 있던해에는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만일 공백이 생기면 어쩌나 하는 약간의 불안감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기 60년 (1975학년도) 첫 입학시험이 시행될때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지원해 많은 학생들이 지원해서 3:1의 경쟁률을 보였다. 그러면 질이 낮아진 것 아니냐고하는 의문이 생기는데 이 문제도 후기입시와 다름없었다.
 이렇게 해서 제괘도에 오르게 되면서 학생들은 실력으로 처음부터 우리대학을 선택하게 되었다. 따라서 학구적 의욕이 솟아나면서 학생들 스스로가 긍지와 보람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후기대학에서 엿볼수 있었던 무력감이 없어지고 당당하게 바로 설수 있는 자세와 내실을 향상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은 10년전 약학과가 신설되면서부터 원광대학에 대한 이미지는 달라졌고, 학교발전의 중요계기가 되었다. 학과 신설때에도 엄청난 기재구입의 난관이 있었기 때문에 교단과 교내에서도 반대했지만 아산님께서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던 것이다.
 약학과 신설은 이에 못지 않은 파문이 일었었다. 전국약사회에서 총회를 열어 시골 지방대학에 허가해주었다면서 약학계의 웃음거리라고 반발했고, 취소투쟁위언회를 구성하여 문교부에 성명서를 내면서 야단을 했다. 그때 약대 교수로는 주로 서울대 약대교수들이 출강을 했는데 이 교수님들에게도 전국 약사회에서 탈퇴시키겠다고 떠들며 형편없는 대학에 허가했다고 난리였다. 당시 전국에 약대는 7~8개 뿐이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안영근, 김재백교수들이 출강해 주셔서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한편 나는 당시 김용태교무과장님과 함께 약대취소투쟁위원장을 찾아갔다. 청량리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만나 인사를 하고 하나하나 따졌다.
 『어떻게 해서 한번 국가로부터 얻은 허가를 취소하라고 하십니까? 이미 입시에 응시에 응해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의 장래를 생각해 보셨습니까? 만일 선생의 뜻대로 약학과가 취소되었다 할때 40명 약학과생들은 어떻게 하라는 말씀입니까?
무엇이 미워 자라나는 젊은이들의 앞날을 가로 막으려고 합니까? 약대 40명 학생들이 선생을 찾아 간다기에 도리상 내가 먼저가서 뵙고 그다음에 너희들이 가더라도 가야 한다고 주저 앉혀놓고 왔습니다. 선생께서도 자녀가 있을텐데. 어찌 이런 무모한 일을 하시려고 앞장서십니까?』
 『제가 혼자 추진한 일은 아닙니다. 어느날 오라고 해서 갔더니 나이먹었다고 시켜 놓은 것이지요. 무슨 원수진 일이야 있겠습니까?』
 이야기를 하다가 점심시간이 되어 먹으러 갔는데 오히려 그분이 우리를 대접해주었다.
『두분의 말씀을 듣고 보니 위원장을 하지 않아야 할 것을 한 것 같습니다. 내려 가시거든 학생들에게 제 개인의 의사가 아니더라는 말씀 전해 주십시요. 저도 노력하겠습니다.』
 약사회에서 원광대 약대 취소하는데 비용으로 쓰라고 모아둔 돈으로 우리에게 점심을 대접한 것이다. 생각하면 어처구니 없는 일들이 많았다. 한나라 한민족끼리 무엇 때문에 상대심을 가져야만 하는지?
알수 없는일이라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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