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 믿으면 모든 것을 다 밀어주셔
개인이고 단체고 전부 국을 터라

 나는 묘량면 삼학리 원성부락에서 3남 5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모님은 사오리 길을 걸어 신흥교당에 다녔기 때문에 나는 일찍부터 원불교를 알게 되었다.
 16세 되던 해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총부 직속 기관인 이흥과원에서 일을 했다. 한해 있으면서 겨울 선을 나고 나니 당시 이흥과원 김형진 교무께서 전무출신 서원서를 내고 여기서 살아라고 하여 그 이듬해 17세때 정식 출가를 하였다.
 이흥과원에서는 낮에 일을 하고 밤에는 공부하기도 했다. 장날이면 지게에 사과복숭아배를 지고 나가 팔았고, 신이 귀하던 때라 짚신을 삼아 신기도 했다. 이곳에서 만 5년을 근무하고 나서 총부에 오니 과수원 경험이 있다고 하여 산업부장이셨던 성산 종사님 밑에서 복숭아 밭 관리를 했다. 산업부에서 1년 근무를 마치고 나니, 인생양성을 해야한다는 정산종사님의 유시에 따라 원광대 교학과 3기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총부 재정은 6.25를 지내고 난 후라 아주 빈약한 때였다. 총부 회의에서는 공비 생을 9명만 뽑자는 의견이 정산 종사님께 전달되었다. 정산 종사님은 지혜를 발휘하셔서 절반은 본인들이 부담하고, 절반은 공중에서 부담하여 18명으로 확대시켰다.
 기관에서 오래 근무하다 공부하러 온 사람들은 양로원에서 노인들을 시봉하면서 학교에 다녔고 나와 처산 김장권 교무는 시봉금에서 쌀 1가마씩을 내 주셔서 공부하게 되었다.
 학생들은 학교를 다니면서 종법실 청소를 하고 정산종사님 시봉을 해야 했다.
 정산종사님께는 원기 36년 1대말 창립준비를 하시다가 뇌일혈로 쓰러지신 이후 거동이 불편했던 관계로 옆에는 늘 사람이 붙어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나도 정산 종사님 시봉을 간접적으로 받들게 되었고 여름방학 때는 집에도 가지 않고 시봉에 정성을 다했다. 이것이 내가 정산 종사님을 모시게 된 기연이 되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자 정산종법사님께서는 정관아! 나하고 같이 살자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얼마 있다 조실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범산 이공전 종사가 법무 실장이었고, 나는 법무가 되어 정산 종사님을 모시고 살았다.
 원기 42년 6월에는 요양 차 장수교당으로 가시는 정산 종사님을 따라 나서게 되었다.
 육타원 종사가 시봉 책임을 맡았고 시봉금이 올라오면 나를 거쳐 안살림을 맡은 할머니에게 전해졌다. 그 할머니는 씀씀이가 커서 무엇이든 풍부하게 장만했다.
 나는 할머니가 이래서는 안되겠다 싶어 절약을 해야한다고 제재를 가했다. 할머니는 내 말에 틀어져서는 교도들이 오면 있는 소리, 없는 소리를 만들어서 말을 전했다. 내가 창고 곡간을 정리하여 법당을 만들었는데 정산 종사님께 가서는 곡간 문짝을 떼어서 버렸다고 억지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화가 나서 나가 언제 문짝을 떼어서 버렸냐고 할머니를 꾸짖었다. 그때 정산 종사님께서는 큰 소리로 정관아! 정관아! 이리 오너라라고 부르셨지만 나는 할머니의 버릇을 고칠 심산으로 그대로 있었다. 이때 남원교구에서 구타원 종사를 비롯한 여 교도들이 교당에 들어서게 되었다. 나는 화가 삭지 않아 뒷산에 바람을 쐬려갔다.
 교도들이 돌아간 뒤 저녁에 내려오니 정산 종사님은 다 알고 있는 일인데 챙기지 못한 내 잘못이다. 정관아, 내가 너의 뜻을 아니까 그 일에 동요되지 말고 그 일에 끌리지 말아라 내가 알면 되지혼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달래고 위안을 시켜주셨다. 나무라시는 것보다 그 말씀이  더 가슴에 맺혔다. 당신 책임으로 돌리시고는 다음에 더 조심하라고 타일러 주셨다.
 정산 종사님의 말씀은 바로 법문으로 화했고 행동으로 나타내시면 도를 실천하는 어른이심을 이 일로 해서 더욱 절실히 느꼈다. 또한 한번 사람을 믿으시면 모든 것을 다 믿어 주셨다.
 정산 종사님은 장수에서 이듬해 여름을 지내고 총부에 올라 오셨다.
 원기 45년 여름에 정산 종사님은 조실 둘레에 있는 측백나무 울타리를 여자부 쪽은 놓아두고 나머지는 철거하라고 하였다. 응산 종사님과 성산 종사님은 조실 주위가 너무 비어 있으면 보기가 좋지 않습니다라고 말씀을 올리니 정산 종사님은 이제는 개인이고 단체고 전부 국을 터야 한다. 공가에서는 특히 더 그렇다. 그래야 후천 기운을 받아 된다라고 하셨다. 이때를 전후하여 정산종사님의 건강이 악화되는 듯 했다.
 정산 종사님께서는 그 동안 한의치료를 계속 받고 계셨다. 가끔 양의한테서도 진찰을 받아 보셨다. 소화가 되지 않아 종합검사를 하니 위암으로 판명이 났다. 그래서 원기 46년 8월에 서울대학병원에 입원하시고 나서 한달 후에 수술에 들어갔다. 병원에서는 육타원 종사가 요양 총책임자로 있었다.
 내가 병원에서 신문을 펼쳐보니 60년 묵은 산삼이 성주에서 발견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어 육타원 종사께 보여 드렸더니 당시 종로교당 교무로 있던 달타원 법사에게 연락했다. 달타원 법사는 대구교당 향타원 종사께 연락 한 후 직접 대구에 가서 산삼을 구해 왔다. 구해온 산삼을 달여 드리니 차도가 있는 듯하여 희망을 가졌다. 그러나 또 다시 10울 1일 저녁에 뇌일혈이 있어 몸을 가누지 못하셨다.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셨으나 이 일이 있은 후 교단 간부진을 불러 열반 준비를 하는 듯 하셨다.
 정산 종사님은 나에게 부모님을 위해 하던 위친 계를 네가 계속 이어 받아 잘 하라는 부촉 말씀을 내렸지만 이리에 와서 보니 하섬 구입비용으로 다 써버렸기 때문에 유지를 받들지 못했다.
 현재 강단에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고 있지만, 수도인 일수록 청렴결백해야 된다는 정산 종사님의 말씀을 늘 새기며 살고 있다.
정리 : 육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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