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교육과 농촌계몽에 생애 바쳐
노년에 원불교 만나 불목교당 창립

 한 기관이 생기게 됨은 특별한 기연과 많은 사람의 끊임없는 노력이 함께 하기 대문이다.
 우리나라 남쪽에 자리한 완도에 원불교 소남훈련원이 설립된 배경도 고 소남 김정광 선생(본명 영현)의 특별한 기연과 대산종법사의 훈련에 대한 염원, 그리고 많은 호법동지들의 합력이 함께 결과이다.
 평소 개척정신이 강하고 여성운동 등 국민계몽활동을 강조하던 소남선생은 노년에도 개척정신의 시범을 보이며 손수 운영하던 소남농장을 새롭게 발돋움하는 교단에 기증함으로써 교단에서 그 뜻을 살려 국민훈련장으로 개척해 발전시킨 것이다.
 고 소남선생은 76세의 고령으로 원불교에 입교하였다. 고향 친구이자 교육사업을 같이 해오다가 고희에 전무출신한 오미산 법사의 인도로 중앙총부를 다녀간 뒤 당시 총부의 교역자 생활, 특히 여자교역자를 양성하여 남녀가 평등한 자격으로 사회활동을 하여 단체는 물론 국가 발전에 임하고있는 것을 보고 개인 차원의 교육보다는 공중에서 그 뜻을 실현시키는 길이 더 크고 지속적일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자신이 정성들여 개간, 경영하던 소남농원 완도군 군외면 불목리 숙승봉 일대의 대지 임야 등 1만5천여평을 교단에 희사함으로써 소남훈련원의 기연이 된 것이다. 이와 아울러 오미산 법사와 협력, 완도에 교당이 없음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교무파견을 요청하여 교화의 장을 마련하고 불목교당의 창립 주로서의 역할을 다 했다.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아들인 김재백(원광대 교수)교도가 67년에 불목리 임야 등 3천여평을, 그리고 부인 이배기 여사가 1월 열반을 하자 살아생전의 뜻을 받들어 자녀손들이 소남훈련원의 유지를 위하여 논답 등 4천여평을 희사하기도 했다.
 소남선생은 1883년 4월 16일 완도군 불목리에서 완도 향교 창립의 유공인인 김광선 옹의 6남2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한말의 위태한 국운 속에서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 서울 학교에 입학 신학문을 수학한 후 대한제국 교원 제1호로써 완도군에 간이학교를 설립하고 후진교육에 힘쓰던 중 일본상인들의 횡포와 폭리 등을 못 마땅히 여겨 오다 국내에서 개성인들이 단결하여 일화 배척에 성공했다는 소문을 듣고 여러 동지와 함께 민중의 계몽운동과 한국인끼리의 구매조합을 설립하여 적은 이익으로 많이 판매하는 경영방식으로 일본인의 상업을 봉쇄하는 실질적인 자주 독립을 전개했다.
일경은 이 운동의주모자를 모두 체포하자 소남선생은 혼자 책임 짊어지고 다른 동지는 석방하라 주장하여 장흥검찰청으로 이송, 5개월 동안 미결수로 갇혀 있다가 치안 유지법 위반 죄로 3년 징역을 받았다. 이에 불복하고 공소하여 대구복심법원에서 3개월 동안 기다리다가 재판이 개정되어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대구감옥에서 알게 된 상주태생의 항일투사였던 조태연씨와 만나 조국 광복을 위하는 일은 민족교육에 있음에 이기가 상합, 석방되자 조씨의 고향인 상주에 가서 마을학교인 조명학교를 세우고 민족교육에 3년 동안 힘써 오다가 과로와 옥중의 고문 등으로 받은 늑막염이 재발하여 부득히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 후 고향에서도 오미산 법사와 함께 협력하여 순외면 교인동에 시립학교를 세우고 향리의 버림받은 후진들을 교화하고 반일교육을 실시하였다. 또한 사립 고금보통학교 설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었으며 완도 중학원에서도 교편을 잡고 영재 양성에 헌신하였다.
 해방 후 군외동국민학교의 설립과 완도중학교의 창립에도 적극 참여했고 온도중학교에서 우리역사와 한문을 가르치며 고문학해설고어활용법구한말사문답사두문연구청해비사진학국마한사등을 저작, 해방된 조국의 한글학 보급과 역사교육에 많은 공적을 쌓았다.
 선생은 항상 쌀밥은 피하고 잡곡과 고구마를 즐겨 먹으며 학문을 좋아하면서 허례허식, 미신타파,, 해태양식의 개발, 농어촌 기계화, 산림의 녹화 등 농어촌 계몽에 적극 힘씀과 아울러 산에 움막을 치고 기거하면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나무심기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가볍고 유연성이 강해 배나 실내장식에 많이 사용되는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그 당시 소남선생이 심은 나무는 지난해 완도청소년훈련원을 건립할 때 건물의 기둥으로 활용되어 선생의 공적이 후세 청소년교육에 필요한 교육장건설의 튼튼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일생을 교육가로 시상가로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소남 선생은 노년에 원불교에 귀의하여 불목교당의 창립 주로서 공익정신을 발휘하다 89세를 일기로 고향인 불목리에서 열반했다.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장님 재만은 강남교당교도로, 둘째 재천은 불목교당 교도회장을 역임한 뒤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셋째 재백은 원광대 약대교수로 재직 중이며 부총장을 역임, 남중교당 교도로서 교도의 역할과 신앙수행에 열중하고 있다.
유용진 편집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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