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성지 역사기행
교단적으로 성역화 사업 추진할 때
이 뛰어난 문중
내 고향 성주

 성산가야 옛 터전에 이어받은 선비문화 높은 기상, 맑은 정기 우람하게 뻗어나네. 옛 기운 새 희망이 하나로 뭉쳐 풍성하고 알찬 여름 가슴마다 넘치네.
화목하고 순후한 내 고향 성주.
 가야산 낙동강벌 기름진 낙토 성주. 자락마다 흐름마다 별처럼 모여 사네. 솟아나는 인걸들 은하수를 이루고 슬기로운 창조정신 가슴마다 넘치네. 영원토록 생동할 내 조장 성주.
 이는 최열곤 씨가 작사한 성주의 노래이다.
 내 고향 성주는 한국 8승지 가운데 꼽히는 가야산을 병풍 삼고 영남인의 젖줄인 낙동강이 굽이도는 살기 좋은 고장이다.
 일찍이 성산가야의 역사 깊은 문화가 꽃피웠던 곳이요, 소안동으로 불리 울 만치 많은 양반들이 성씨의 고향인 촌락을 형성해 자자손손이 뿌리 내려 살며, 전통 있는 선비문화로 나라와 민족을 위한 충절의 인물을 많이 배출한 자랑스러운 고장이기도 하다.
 고려시대나 조선조 시대에는 경사부, 성주우 등으로 비교적 큰 비중이 있는 고을이었으나 일제시대에 철도가 개통 될 당시 성주 양반들이 철로가 지나가는 것을 극구 반대함으로써 경부선이 부득이 왜관으로 돌아가게 됨에 따라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발전이 늦어지게 되었다.
 자연 개발의 손길이 많이 닿지 않아 크게 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대신 비교적 오염되지 않은 자연환경을 보존해 왔다.
 그러다 최근 특산물인 수박참회 농사의 번창과 국립공원가야산 일대의 개발 및 대구 근교에 위치한 까닭 등으로 경제적으로 활기를 띄기 시작하였다.
원불교 성자의 탄생
 오랜 역사와 전통에 비하여 널리 알려지지 못했던 내 고향 성주가 정적을 깨고 이 나라 한국은 물론 장차 오대양 육대주에 그 명성을 떨치게 되었으니 이는 후천 개벽의 주세회상인 원불교로 기인하게 된 것이다.
 원불교 교조이신 새 부처님 소태산 박중빈 대종사의 법통을 계승하여 오늘날 원불교 발전의 터전을 확립했던 정산 송규 종사와 그의 친제 주산 송도성 종사 즉 두 분 성인이 바로 별고을 성주에서 탄생하였기 때문이다.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에서 정산 종사는 1900년 음력 8월 4일에, 주산종사는 7년 뒤인 1907년 음력 11월 19일에 탄생했다.
 정산주산종사 형제분은 불교로 치면 석가모니불의 좌우보처로 모든 보살의 으뜸이 되어 지혜와 덕을 책임 맡아 교화와 제도를 돕는 문수보현 보살에 견줄 수 있는 성인들로 새 주세불 소태산 대종사의 좌우보처불로서 원불교에서는 대종사와 더불어 정산주산종사 형제분을 대각여래위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
 이 형제 성인이 나신 소성리는 소야와 구성을 합하여 부르는 이름이며, 박곡과 연봉도 같은 마을에 속해 있다.
 소성리는 앞으로 ,  등이 속해 있는 용봉리와 봉정리 등이 잇다.
 소성리는 고대 중국의  임금이 나라를 다스릴 시절에 사양의 덕을 노래지어 부르니 봉황이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 소소구성에 봉황이 내의라는 고사에 인유한 마음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한편 세밭 아래에 가히 만인을 살리는 땅이 있다(삼전지하 가활문인지지)라는 전래 비결이 이 동네에 전해져 왔네, 정산 주산 종사가 탄생한 소성이 위로 월전, 진전, 변전이 있어 일찍이 두 성자의 탄생을 예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향 고산정의 역사
 정산종사 탄생지는 소성리이나 그 부치인 구산 송벽조 대희사가 결혼할 때까지 역대 선조들이 대대로 세거하였고, 그 종친들이 오늘날까지도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는 원고향은 이웃 동에 고산리이다. 이곳 고산리 일명 고산정)를 찾아 가 보아야만 비로소 정산종사 가문의 전통과 뿌리를 헤아려 볼 수 있다. 정산종사께서도 살아 생전에 당신 고향을 묻는 이 있으면 성주 고산정이라고 답했던 것이다.
 가야산 해인사 밑 경남 합천군 야로면에 관향을 둔 야성 송씨 일파가 성주군 초전면 고산리에 정착, 세거하기 시작한 것은 1551년, 즉 지금으로부터 442년 전 이었다.
 인 충연공 가계 송희규선생(1494-1558)은 정산종사의 14대조로 조선조 중종때 상주목사, 대구부사, 사헌부 장령, 집의 등을 지낸 인물로 을사사화 때 사헌부 장령으로 있으면서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의 행패를 탄핵하다가 전라도 고산으로 유배되었다. 5년만에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송희규는 초전면 송천의 고향으로 돌아와 산천을 돌아 바다가 맥산으로 이거, 유배지인 고산 생활을 잊을 길 없어 자를 자로 고쳐 마을이름을 고산정이라 했다.
 송희규가 백세각을 짓고 학문을 닦자 인근 의 발길이 잦고 일문의 만세를 기린다는 전설이 있는 마을은 번성, 한때 수백 호에 이르렀었다.
 이후 고산정 송씨들은 벼슬보다는 학문을 가까이 하여 의와 효와 절로 점철됐다는 것이 문중의 자랑이네, 송희규의 17세손까지 문집이 계속 발간된 것는 송씨 문중의 학행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고산정은 31운동 당시 성주지방의 항일 운동의 요람이었다.
 정산종사의 어릴 적 유학스승이었던 공산 송준필이 주동한 이 운동은 당시 백세각에서 20여 종친이 모여 31 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유림이 한 명도 참가하지 않은 것을 개탄, 독립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했다.
 이들 가운데 송준필, 외천 송학래 2인은 김창숙 곽종석 등 유림 거두들과 연락, 1919년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평화 회의에 우송한 전국유림대표 137명의 서명으로 한국독립을 호소했던 (일명 ) 작성에 앞장섰다. 송준필은 이 사건으로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렀으며, 그의 3남인 송수근이 1년의 옥고를 치른 것을 비롯, 송연집(전무출신 송성찬 교무의 부친으로 보산 송창허) 등 종친 10여명이 독립유공인으로 추서 되었다. 독립운동의 거점 지였던 백세각은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163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고향 성주 종친들의 애국 독립 사상은 후일 정산종사 부친인 구산 송벽조 대희사의 일본 천황 진정서 사건과 무관하지 않다고 파악된다.
 송벽조가 원기 24년(1939) 전북 진안 마령교당 교무로 있을 때 일본이 패도정치로써 식민지인 조선을 유린하는 행패에 분격하여 천황에게 진정서를 써보냈다가 체포되어 이란 죄목으로 1년6개월 간 옥고를 치렀던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의 만남
 원불교 교조이신 소태산 대종사가 유교의 공자 시라면 정산종사는 맹자이시오, 대종사가 도교의 노자 시라면 정산종사는 장자 같은 성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운 최제우 대신사가 수제자 해월 최시형 신사를 만나 동학 즉 천도교를 꽃피웠듯이 후천 개벽의 주세 불이신 소태산 대종사는 개벽계성이신 정산종사를 만나 제법 주로 삼음으로써 전무후무한 일원대도를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분 큰 스승님의 만남은 우주사적 역사적 만남이요, 서로 찾고 찾아주신 필연의 만남이었다.
 대종사 대각을 이루시고 이 회상 최초의 교화단을 조직하실 제 먼저 8방의 단원만 정하시고 중앙위는 비워두어 임시로 대리케 하시며 이 자리에는 맞아들일 사람이 있나니라. 뒤에 에서 올 것이다하시고 하늘의 의 움직임을 보시고 중앙재목이 있는 곳을 추적하셨던 것이다.
 정산종사는 10여세에 이미 유서를 통독한 후 마음의 스승을 찾아 가야산, 전북 원평 등지로 구사고행을 하던 중 19세 되던 원기 3년(1918) 4월에 정읍군 북면 화해리 김도일 가에서 스승인 소태산 대종사의 친영을 받아 역사적 만남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 후 원기 4년(1919) 9월 고향에 남아 있던 정산종사의 조부, 부모, 부인, 아우 등 일가를 솔거하여 전남 영광으로 이주해 전 가족이 모두 원불교 회상창업에 큰 주역들이 되었다.
전남 영광과 경북 성주
 일찍이 주산종사는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체포되어 1년6개월 간 옥고를 치른 후 출옥하여 고향 성주에 머물고 있던 구산 대희사에게 이곳 영광은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또한 경계가 매우 아름답고 고요하여 편히 쉬시는 데에는 아주 적당한 곳이오니 속히 이곳에 돌아 오시와 자손들의 마음을 놓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나이다(한문 편지해석)라고 상서하였다.
 주산종사가 밝혔듯이 정산종사 탄생지인 성주성지의 풍토가 대종사 탄생지인 영광성지와 흡사하듯이 대종사와 정사종사 두 성인은 물론 그 가족가지라도 숙겁의 두터운 법연으로 합해진 불보살들로 믿어진다.
 어찌 전남 영광에서 탄생하신 대종사께서 호남 땅에서 발생된 원불교가, 경북 성주 사람인 정산종사를 기다려 제법 주로 삼고 법통을 계승케 했으며, 그리하여 새 회상 원불교를 한국은 물론 장차 전 세계 인류를 구원할 주세종교로 완성할 수 있었을까.
 이는 우리 후진들이 두고두고 궁구하며 파안 미소할 일이라 여겨진다.
성주성지 성역화 서둘러야
 원불교 교단 창업에 기여한 정산종사 일가의 역할을 재고해 볼 때 성주성지의 성역화 사업은 이제 범교단적으로 서둘러야 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원기 70년(1985) 원불교 중앙문화원(원장 이공전) 주관으로 정산종사 구도 성장 지인 백곡에 기념비를 세워 놓았으나 그 정도로는 성역화의 시작에 불과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시급한 과제는 15여년 전부터 줄다리기를 하고 있는 탄생가 인수를 조속한 시일 내에 매듭지어야 할 것이며, 여타 성역화 사업은 교단적 차원에서 규모 있게 전개되어야 할 것이다.
 정산종사 열반하신 지 만 31년, 앞으로 만 7연후면 정산종사 탄생 1백주년이 된다.
 정산종사 탄생 1백주년 기념사업회를 교단적 합의를 모아 공식적으로 발족시킨 후 교도는 물론 정산종사를 숭모하는 뜻 있는 모든 사람들의 합력으로 성주성지 성역화 사업을 폭넓게 추진하여야 할 것이다.
 정산주산 종사 두분 여래불의 탄생지인 성주성지의 성역화사업이 원불교 발상지인 호남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극히 열세한 영남지방의 원불교 교화 발전에도 신성한 촉진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하며, 대산종법사님을 비롯한 교단 지도부의 성주성지 성역화 사업에 대한 열의를 간절히 촉구 드리는 바이다.
사진1>정산종사 14대조인 송희규 선생이 지은 백세 각은 경북 지방문화재 제 163호로 정산 종사 어린 시설 공산 송준필 선생으로부터 유학을 배운 곳이요. 유림 독립운동의 거점지였다.
 사진2> 정산종사가 구도 행각을 벌였고, 가족이 1919년 영광으로 이주하기까지 살던 집터로, 원기 70년에 세운 기념비인 소성구도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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