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의 사유재산은 과연 필요한가?

 성직자의 사유재산은 과연 필요한가? 얼마나 필요한가? 얼마나 필요한가? 이 물음에 대해 깊이 생각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일찍이 톨스토이는 인간에겐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죽어서 묻힐 한 평의 땅이면 질문을 던지고, 죽어서 묻힐 한 평의 당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살아서 많은 재산 모으기에 혈인이 된 사람들에 대한 우정 있는 충고인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정당한 방법으로 재산 모으고, 국가사회를 위해 바람직하게 만 사용된다면 재산은 많을수록 좋다고 한다. 종교 성직자의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사회의  교 성직자들 중에는 적지 않은 사유재산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가 상당히 있다고들 한다.
 슈바이처가 어린 시절 친구와 힘 싸움을 하는 데 그 친구의 힘이 약했다. 친구가 하는 말이 나도 너처럼 잘먹고 자랐으면 결코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고 했다. 이 말은 슈바이처에게 큰 충격이었다. 그는 남보다 잘 먹고 사는 것이 자랑스럽다기보다 오히려 죄송스럽다는 생각이 앞섰다. 그가 아프리카의 밀림지대에서 미개한 토인들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희생했던 것도 이러한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아무리 자본주의 사회라 할지라도 성직자의 사유재산은 결코 떳떳할 수도 없고 자랑스러울 수도 없다. 성직자도 남으로부터 경제적 의존 생활을 하지 않고, 자신의 건강유지나 노후 생활을 위해서 최소한의 사유재산은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최소한의 것이다.
 성직자가 많은 사유재산을 가지고 물질적으로 남보다 풍부한 생활을 한다면 이는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죄송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더욱이 개인의 권리명예를 유지하기 위한 순간으로서 재산을 사용한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각종 개혁작업은 모든 국민의 의식개혁이 밑받침되어야 한다. 진정한 의식개혁은 성직자가 앞장서고 모범을 보여주어야 한다. 지나친 빈부격차로 인한 양극화 현상이 해소되어야 모든 국민이 화합 단결할 수 있다. 재산을 모으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그러기에 얼마나 모았느냐 보다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
 상당한 사유재산을 가진 성직자는 재산을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국민들에게 보여줄 때가 되었다.. 꼭 필요한 최소한의 재산 이외의 것은 국가 사회를 위한 공익사업에 바람직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최대한 가치 있게 사용하는 것은 우리사회의 잊혀지고 그늘진 곳을 위하여 무상보시의 정신으로 희사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국가의 정책에서 소외된 곳이 너무도 많다. 이런 곳에 성직자의 사유재산이 가치 있게 쓰여져야 하는 것이다.
 정치인이나 공직자의 사유재산도 공개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그들도 역시 공익사업에 가치 있게 쓸 수 있도록 성직자들이 유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교단에서 앞장선다면 교단 개혁과  교화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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