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초기 창립인연들의 (보고)였던 당
주세불 기연 닿은 새회상 거룩한 터전

 계룡산과 함께 예부터 많은 성인들과 도인들이 즐겨 찾으며, 한국종교의 본산지로 불리 우는 모악산.
 모악산의 정기를 받아 원불교와는 회상창립 초기부터 각별한 인연을 맺어온 원평은 소태산대종사가 교서를 편찬할 때 맺은 금산사 칠성각과의 인연하며, 회상창립의 중추적 역할을 했던 선진들, 특히 정녀 1호였던 공타원 조전권 종사의 고향이기도 하다.
 70여년의 교화역사를 갖고 오늘에 이르고 있는 원평교당은 원기 4년 3월에 소태산대종사가 금산사에 행가, 신앙과 수행의 대상인 법신불일원상을 그려 보인 곳 일뿐 아니라 정산종사가 스승 찾아 도를 구하기 위하여 전라도에 와서 최초로 머물었던 땅이다.
 어디 그뿐인가 대산종법사의 은생지법생지로 대종경 편수 초안 역시 이곳에서 이루어졌고 40여명의 전무출신을 배출한 원불교와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터전이다.
교당창립의 염원
 소태산 대종사는 변산 봉래 정사에서 수양하며 원평을 비롯, 만덕산 서울 등지로 행가하여 창립인연들을 규합한 후 원기 9년 4월 이리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본격적인 새회상 건설의 성업이 시작된 것이다.
 총부건설에 가일층 노력해온 대종사 이하 선진들은 총부를 중심으로 한 교세확장의 필요성을 절감하던 중, 일찍이 봉래정사에 내왕하면서 원평에 교당건립을 염원해 왔던 구남수이만갑장적조장정수 선진 등이 원기 10년 이를 실천에 옮겼다.
 원기 10년 3월부터 도조를 걷어 기본자금을 수합하여 유지대책을 마련한 후 동년 7월부터 2년 간 구월리 김원형씨(이만갑 선진의 아들), 조송광 선생(조전권종사 부친)집에서 5년 간 출장법회를 보았다.
 이 같은 각별한 노력과 정성은 원기 15년 원평리 소재의 목재초가 19간2동을 매입하여 수리한 후 불법연구회 원평출장소라는 현판을 걸고 출장소를 개설한 후, 원기 17년 4월에 박대완 초대교무가 부임, 오늘의 원평교당 교화역사의 시발이 됐다.
금산과원과 동화병원
 현재는 없어졌지만 동화병언의 시초였던 금산요양원도 원평교당에서 비롯됐다. 원기 27년 금산지부(원평교당)는 교당 운영을 교도들에게만 의지하지 않고 자체수익 사업체인금산과원을 경영했었다.
 당시의 금산과원은 배나무 7백여주를 모체로 약간의 채소도 생산하는 영육쌍전의 도량이었다.
 금산과원은 당시 영광군 묘량면에 있는 이흥과원과 전북완주군 삼례읍에 있는 수계농원과 더불어 교단의 수익기관으로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었다.
 금산과원은 교단만대를 책임지고 나갈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사업에도 한 몫을 하고 있었다. 금산 과원에서 얻어지는 이익금의 일부가 유일학림 운영에 일부 보탬이 되고 있었다.
 배나무 7백여주를 모체로 약간의 채소도 생산하는 영육쌍전의 산 도량이었던 금산과원은 후일 유일학림 운영과 정치적 공백기와 민생치안의 부재 등에 따른 현실적인 어려움으로 원기 35년 6.25이후 요양원 터가 저수지로 변경되어 요양원은 총부로 옮기게 됐다. 북일 진료소로 이름을 바꾼 금산요양원은 후일 다시 동화병원으로 변경, 운영됐다.
구도발길 머문 땅
 원평은 예로부터 금산사를 중심으로 신흥종교의 근거지였다. 넓은 호남평야를 주변으로 모악산이 솟아 진리를 탐구하는 많은 도꾼들의 왕래가 있었던 곳이다.
 금산사는 모악산에 있는 유서 깊은 고찰이다. 국보 62호인 미륵 전에는 11.8M의 거대한 미륵불상이 조성되어 있다. 이 미륵전 옆에 방 하나를 빌려서 대종사는 팔산대봉도와 함께 짚신을 삼아 원평 장에 내다 팔면서 회상창립의 소중한 인연들을 기다렸다.
 금산사에서 얼마간 머물며 대종사는 문 미에 친히 (원)을 그려 보이기도 했다. 새 회상 원불교의 신앙과 수행의 표본인 법신불 일원상이 그 형상을 드러내 보이는 거룩한순간이었건만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둥그러운 그 형상이 무엇을 뜻하는지.
 대종사와 기연을 맺은 이 땅은 우연이었을까. 정산종사와 대산종법사도 기연을 맺게된다. 정산종사가 수도를 위해 조선 8경의 하나로 꼽혔던 가야산을 찾은 것은 원기 2년. 뜻을 이루지 못한 정산종사는 당시 강증산교가 교세를 떨치고 있던 전라도. 그 중에 모체가 되는 금산사 주변을 찾게 된다.
 보천교를 창립한 차경석을 만나 큰 일을 벌이고 계신다하니 천하 창생을 위한 천하대사가 무엇이요. 어떻게 하는 것이 천하대사가 되겠오라며 정중한 예를 갖추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으나 문제에 대한 일 구의 반응도 보이지 않고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고 대원사로 발길을 옮겼다.
 정산종사는 대원사에서 당시 강증산 계통의 태을도를 열렬히 신봉하고 있던 김해운 선진을 만나게 된다. 이때의 만남으로 비롯하여 화해리에서 대종사의 친영을 받게되는 정산종사는 결국 한때의 만국양반에서 만생령의 자모로, 대도정법 회상의 막중대사를 책임 받게 된다.
 원평교당은 대산종법사와도 매우 지중한 인연을 갖고 있다. 해방직후 악화된 건강을 치유하기 위해 고심하던 대산종법사에게 정산종사는 원평교당을 권했다.
 원평에서 요양하던 중 대종사 법문을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대종경 초안을 시작하게 된 대산종법사는 원평을 일러서 일체동포와 만 생령에게 대종사님을 바로 받들어 닮아가서 주세불의 튼 은혜에 목욕할 수 있도록 한 보은지라고 했다.
이웃과 함께 하는 교화
 오늘날 일선교화현장에서 대종사님 혜명의 등불을 높이 쳐들고 광대무량한 불 국토 건설을 위해 심혈을 기울이는 수많은 교무들. 원평교당을 거쳐간 많은 교무들 역시 개개인의 안위를 도모키 위해서가 아닌, 오직 이웃과 은혜를 발견하고 그 은혜를 함께 나누는, 그래서 혜복의 문로를 열어 가는 개벽 인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원평교당은 회상창립의 어려웠던 시기에 영산신흥다대 교당 등과 더불어 교당교화의 주역으로 용신하해금구교당 등 세 교당을 연원교당으로 분가시켰다.
 교당설립을 계기로 입교한 교도의 경우 1대에 726명(남 290여 436), 2대에 635명(남 262여 373)으로 1,400여명에 가깝다. 이 같은 입교수치는 오늘의 원평교당이 있기까지 그동안 활발했던 교화신장의 일단을 엿보게 하기에 충분하다.
 회보를 살펴보면 1대 결산대 45명의 거진출진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원평교당에서 배출한 전무출신으로 조전권조만식조일관고형종송자명이종명김인석조정근김법진최순철김지영김화경이명인유일봉온화중최인학송선만전봉선전종철 등 수 많은 인재들이 배출, 오늘의 교단 이곳 저곳에서 눈부신 활동을 하고 있다.
 대지 2천 2백여평의 원평교당은 교당입구에서 법당가지 30M의 양편으로 관상목이 심어져 있어 여느 교당과는 달리 공부와 수양을 진작시킬 수 있는 천연의 조건을 구비하고 있다.
농촌교화의 산 역사
 원평교당은 대종사께서 친임하신 초창기 농경사회 교화의 산실로 일찍이 이원의 법음이 전파된 곳이다. 그러나 세월의 흐름으로 기존의 원로교도들이 열반하고, 한편 오늘날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문제들, 즉 급격한 산업사회로의 전환에 따른 농촌인구의 이동현상 등에 영향 받아 교당의 교세도 적잖은 위축현상을 보였다.
 그러나 침체적 현상을 상황 성만으로 인식하기에는 기존의 원평교당이 갖는 초기교단에서의 기능과 역할이 너무도 컸기에 유아원(어린이집)을 통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 원기 60년대이다.
 대종사 탄생 1백주년 성업봉찬대회를 앞두고 교정원 교화부에서 전개한 입교배가운동에 원평 교당은 5백여명이 훨씬 상회하는 실적을 계기로 교도가정 일원가족화 운동을 추진했다. 뿐만 아니라 주부대학노인대학청소년교실 등을 개설, 다각적인 교화를 모색하고 있다.
 오랜 교화역사를 가지고 있는 원평교당은 새로운 도약이기에 앞서 초창기 그 활발했던 진리에 대한 믿음으로, 전교도가 신앙과 수행에 남다른 열정으로 공부했던 법풍을 다시 불리기 위하여 오늘도 무한한 가능성으로 스스로가 미륵불의 화현인양 정진하고 있다.
 금산사의미륵불이 갖는 의미와 함께 증산천사의 교화터전이었던 원평. 그 원평에 후천 시대의 주세 불이신 소태산 대종사의 기연 등이 어우러져 도덕의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길 염원해 본다. 원평의 지명이 갖는 의미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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