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보리야 네 뜻에 어떠하냐. 가히 삼십이상으로써 여래를 보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가히 삼십이상(三十二相)으로써 얻어보지 못하나이다. 어찌한 연고인가 하오면 여래께서 말씀하신 삼십이상이 곧 이 상이 아닐새 이것을 삼십이상이라고 이름하나이다.'

그러니까 앞서서 말씀한 우리의 인격을 보리심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다. 모든 번뇌를 보살심으로 바꾸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을 똑똑히 안다고 하면 이 일을 안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인과관계의 생각이 토가 떨어지게 되면 악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목에다 칼을 들이대고, 너 악을 범하라고 죽인다고 해도 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악이나 이런 보살심이 어디서 나오느냐. 육경에서 나온다. 중생은 육경을 만나 중생심이 나오고, 보살은 육경을 만나 보살심이 나온다. 그래서 부처의 마음을, 부처를 이루는 데 있어서의 수행이 있어야 하는데, 그 수행을 통해서 얻어진 상이 바로 32상이다.

32상이란 육신적으로 좋은 상호를 갖추었다는 것이기도 하지만, 실은 여기에서 32상이라고 하는 것은 32청정행을 하는 것이다. 서른두 가지의 청정행을 하는데 그럼 무엇이 서른두 가지의 청정행이냐 하면, 안이비설신으로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6바라밀)의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6바라밀을 5근에다 둘러 씌워서 수행을 하면은 5×6=30으로 30개다. 거기에다 무상무주, 무상무위 이것을 합하면 서른 둘이다. 이것을 32상이라고 한다. 우리 5근으로 6바라밀을 수행을 하고, 거기에다가 무상과 무위의 수행을 곁들이면 그것이 32수행상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32수행상을 닦으셨다는 그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제 1차적인 의미는 '육신 상호가 32상으로 좋은 것이 부처님이 아니다' 이 말씀이 하나 있고, 그 다음에 가서는 '32수행상을 하는 사람이 부처님이 아니다'라는 그 말씀이 있다.

32수행상을 하는 사람이 부처님이 아니라 32수행상까지도 툭툭 털어버린 사람이 부처님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조달이라고 하는 분이 계행을 청정히 하여 그 하는 것은 부처님보다 더 철저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조달이 회상에서는 규율이 아주 엄격해서 부처님보다 더 엄격하다. 그렇다고 조달의 보고 부처님이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 흉내는 낼 수 있지만 부처님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32수행을 해 가지고 하나의 인격상을 이뤘다 하더라도 그것을 놔야지, 그것을 붙들어 가지고 있다면 다시 아상 인상 수자상 중생상 사상이 가득차버린다. 마음 가운데 32수행상을 닦고 끝내 털어버리지 못하면 사상이 다시 또 충만해진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다. 이것을 다 놔버려야 진짜 여래라고 할 수 있고 여래를 볼 수가 있다.

<만덕산훈련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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