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통대 다니며 만학의 꿈 이루어

방송통신대 국문과 1학년 학생, 내년이면 회갑을 맞는 여연심 교도(59, 중구교당)의 신분이다. 『이 나이에 젊은 학생들과 함께 공부 할 수 있다는 것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입니다』

呂교도가 50이 넘은 나이에 배움의 용기를 낸 것은 못배운 한 때문이다. 자식들 공부 뒷바라지 하면서 같이 공부하려고 몇차례 시도해 보았지만 그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6.25때 머리를 다쳐 더욱 힘들었다.

『배움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어요.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시작해 보려고 공책이며 연필을 버리지 않고 모아 두었어요』 이런 어머니를 보고 작은 딸이 1988년 YMCA에서 실시하는 한글학교에 입학을 권유, 초등학교 4학년 과정에 입학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못 들어가겠더라구요. 그런데 막상 가보니까 저같은 사람이 2백여명이 넘어 용기를 얻었어요』

그런데 수업때마다 기도와 찬송을 하는 것이 맘에 걸렸다. 이미 고향인 불갑에서 입교해 광주교당을 거쳐 중구교당에 열심히 다니고 있을 때였기 때문이다. 배우는 재미로 고비를 넘겼다. 하루는 어느 기독교인이 글씨를 잘 써서 비결을 물어보니 「성경쓰기를 한 덕」이라고 해서 그때부터 교전쓰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초등학교 과정만 마치려고 했는데 중학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나니 「중학과정을 하지 않으면 배운 것도 다 잊어 버린다」고 강권하는 바람에 수도여중과 동신실고 특별학급을 다니게 됐다. 정식 학생으로 교복을 입고 가방을 들고 6년간 중.고교 과정을 마쳤다.

그는 『학교 진도를 따라 가려면 EBS교육방송을 하루종일 시청해야 했어요. 남들 1시간 하면 될 것을 서너시간 해야 겨우 따라 갈 수 있었어요. 남편과 자녀들의 이해가 없었으면 엄두도 못냈을 겁니다』고 말한다.

고등학교 과정을 마치고 나니 「내친 김에 대학까지 가라」는 권유를 뿌리치지 못하고 방통대 국문과에 우선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공부는 정말 힘듭니다. 매일 저녁 유림회관에 가서 보충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는 동안 2남2녀의 자녀들은 모두 대학을 졸업, 큰 아들과 작은 딸은 의사로, 작은 아들은 회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이처럼 강한 의지를 갖게 된 것은 염불의 공덕이라고 한다. 광주교당에 다닐 때는 성한데가 없을 정도로 병고에 시달렸다. 이때 金至善교무(현 인천교당)의 인도로 독경집을 독송하면서 3개월만에 병고를 이겨내는 체험을 했다. 그는 『「그때부터 염불만이 살 길이다」라는 일념으로 염불을 쉬지않고 있습니다』고 말한다.

呂교도는 공부를 하느라 교당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을 미안해 한다. 하지만 법회출석을 비롯 4종의무 이행은 철저히 이행하고 있다.

『남편의 법호수여식을 계기로 저도 더 열심히 공부하고 입교연원 다는데 힘을 기울일 작정입니다』고 말하는 呂교도를 보면서 만학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원불교인의 의지를 엿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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