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립정신 되살리어 선진유업 이어받자”



스승님 복이 많으신 분

『차 한 잔 들지』

친히 따라 주시는 한잔의 차에 마음이 편안해진다. 종사님께 원불교에 인연맺게 된 계기를 여쭈었다.

『스무살 때 부친이 돌아가셨어. 그간 인생무상을 생각해오던 마음이 깊어져 이듬해 백양사를 찾았지. 송만암 주지스님께서 선방에서 공부하도록 하셨지. 그런데 첫날 밤 꿈에 검정 도포를 입은 도인이 나타나 「여기는 네가 있을 곳이 아니니 당장 떠나라」고 호통을 치는 거야. 그저 꿈이거니 생각했지. 두달쯤 지나 집에 다녀오려는데 그 도인이 꿈에 또 나타났어. 「잠시도 지체 말고 빨리 떠나라」고 하시는 거야. 모친께 그간 이야기를 했더니 「이모님(朴天時玉 당시 신흥지부 교도)에게 가보라」고 하셨어. 亨山 金洪哲 종사(당시 신흥지부 교무)의 안내로 영산성지에 계신 정산종사를 뵈었지. 道와 德에 대한 법문을 듣고 너무 기뻐서 「저도 이 공부를 하고 싶습니다」 했더니, 「한달 후에 총부에서 동선이 있는데 36원만 준비하면 삼개월간 공부할 수 있다. 총부에는 대종사님이 계셔서 큰 공부를 할 수 있다」고 하셨어. 원기25년 12월 5일 총부에 오니 당시 교무부장이신 大山상사님이 입선수속을 해주시고 교감이신 主山종사께 안내했지. 주산종사님을 따라가 대종사님을 뵙는 순간, 너무나 놀랐어. 백양사에서 꿈에 뵌 그분이셨거든. 바로 입교를 하고 며칠 후 법명증을 받아 조실에 가니, 대종사께서 「법명 참 좋다. 安자는 定이요, 理자는 慧이며, 正자는 戒라. 이것이 삼학을 요약한 것이다. 이대로만 공부하면 훌륭한 불보살이 될 것이다」 하셨지. 동선 결제를 하자 바로 수좌를 맡기셨어. 선을 마칠 무렵, 주산종사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고 물으셨어. 「여기에서 살고 싶습니다」 했더니 전무출신서원서를 내라고 하셔서 수속을 밟았지. 이후 총부 서무부 서기, 총부 외감원 등으로 일했어. 나라 형편이 그랬듯이 불법연구회도 참 간고했어』

잠시 무슨 생각을 하시는 듯하더니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으신다.

기자가 스승님 복이 참 많으시다고 부러워하자, 고개를 끄덕이신다.

『일생동안 아슬아슬한 순간이 세번 있었어. 첫번은 백양사에 머물지 않고 원불교에 귀의하게 된 일, 두번은 정산종사께서 영산학원에 받지 않고 총부로 보내셨던 일, 세번은 동선을 마치고 주산종사께서 전무출신을 받아주신 일이지. 총부생활 중에 대종사께서 하루는 조실 앞을 지나가는 나를 불러 앉히고 물으셨어. 「나 말고 네 마음 가운데 사표(師標)로 삼는 스승이 누구누구냐?」 서슴없이 「정산, 주산」 입니다 했지. 「네 말이 옳다. 그런데 대거(대산상사)가 공부길을 잡았느니라」 하셨어. 「주산종사는 어찌합니까」 했더니 「주산도 좋지만 정산과 대거를 사표삼으라」고 하셔서 그것이 화두였는데, 그 후 3년만에 주산종사께서 열반하자 의문이 풀렸지』

정산종사와 주산종사 이야기를 더 듣고 싶다고 하자, 환히 웃으시며 말문을 여신다.

『정산종사는 지극히 부드러운 성자이셨고 주산종사는 대기대용의 기상으로 상벌이 분명하신 어른이셨지. 원기 27년 동선을 앞두고 대종사께서는 정산종사를 총부로 부르고 주산종사를 영산으로 보내셨어. 대종사께서 하루는 나를 부르시더니 「이리목공소에 가서 대각전의 내 법상(法床)과 같이 하나 짜오라」고 하셨어. 법상이 동선때가 다가와도 안오자 재촉하셨어. 법상이 오니 선방에 놓으라고 하셨어. 동선 때, 하루는 정산종사가 강의하는 오전시간에 나오셔서 법상을 바로 놓게 하고 정산종사에게 「이제는 위의를 갖춰야 한다」며 앉으라고 하셨어. 정산종사가 사양하자 강연히 앉으라고 명하셨어. 마지못해 앉아 시간을 보신 다음 며칠 후에 치우게 되었지. 나중에 알고보니 법계승을 표시했던 거였어』

`몸으로써 먼저 실행하라'

교단의 원로이신 종사님의 전무출신으로서 일생이 궁금했다.

『유일학림 1기생으로 졸업하고 도양교당 교무로 발령받아 정산종사께 인사올리러 가니 갖고간 노트에 「以身先之‥몸으로써 먼저 실행하라」라 써주셨어. 전무출신으로서 일생표준으로 삼았지. 이어 전주교당, 부산교당까지 16년간 교당에 있었고, 영산선원, 동산선원, 중앙선원, 중앙훈련원 등 교육훈련기관에서 40년 있어온 거야』

차 한잔을 드시는 사이, 종사님의 친저인 『의두성리 연마』, 『원불교교전해의』가 빼곡히 꽂혀 있는 서가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자 성리에 관심가지셨던 기연을 설명해주신다.

『동선 마칠 즈음 3일간 밤시간에 대종사님께서 대중들과 성리문답을 하셨어. 문답에서 합격하면 견성인가를 해주신다고 하셨고. 그때 의두성리를 연마해야 견성성불을 할 수 있다고 확신했지. 그래서 늦어도 사십까지는 견성하리라 결심했어. 성리연마 방법을 생각하다 대종경 서품 1장 법문이 성리를 깨달아 표현하신 말씀이요, 일원상을 종지로 한 교리 전부가 성리를 밝혀 일상생활에 활용케 해주신 것을 알고 교리연마에 전력하게 되었어. 본격적인 정진은 영산선원에서부터였어. 그리고 정산종사님이 「香山」이란 법호를 주실 때 깨달았지. 대종사께서는 법명을, 정산종사는 법호를 「定香, 慧香, 戒香」으로 삼학을 표준잡아 주셨구나! 정산종사께서 또한 삼학공부 표준으로 공원정(空圓正)을 써주셨지. 그리고 대산상사께서도 임실에서 요양하실 때, 내손을 잡고 「이정이가 공부길을 잡았는지 모르겠다. 공부길 잡아야 한다」고 하셨어. 스승님들이 주신 공부표준으로 참 주밀하게 공부했어. 그러던 중 동산선원에서, 대산상사를 모시고 대법회를 보았거든. 그 때 법위등급에 관한 법문을 내주시고 공부표준 삼으라고 강조하셨는데 출가위부터는 국이 터져야 한다고 하시며 대중들 앞에서 문득 그러셔. 「이정이는 국을 벗어날른지 모르겠어」 얼마나 뜨금하던지, 너무 세세하게 공부하는데 치우친 것을 경계해주신 거야. 그때부터는 출가위를 표준으로 공부를 시작했지』

중앙총부에 정산종사 「삼동윤리」 기념표적 세웠으면

젊은 교역자들이 열심히 뛸 수 있는 여건 만들어줘야

교육훈련기관에서 40년을 봉직하셨는데 훈련과 연관지어 교화관이 어떠신지 알고 싶었다.

『요즈음 훈련은 형식화된 점이 있는 것 같아. 이름은 훈련인데 정작 훈련은 아니고. 최소한 3일은 되어야 훈련이라 할 수 있겠지. 바삐 사는 세상이지만 주말이나 밤시간 등을 이용해서라도 2~3일씩은 훈련시켜 교리를 제대로 깨달아 실천하게 해야 돼. 법회로만 만족해서는 안돼』

원로원에는 언제 가실 예정이신지 여쭈자 껄껄 웃으신다.

『나도 퇴임 후, 원로들과 같이 생활 할 생각이었으나 대산상사께서 「중앙훈련원은 교역자훈련기관이니 나와서는 안된다」고 하셔서 있게 된 거야. 특별히 맡은 책임은 없고 때로 강의, 교역자나 외부 손님과 대화 등 도울 일은 돕지. 머잖아 남의 도움을 받을 처지가 되면 물러나야지. 지금 원로원이나 수도원이 부족하다고 하는데 우리도 절에 조실 스님처럼 인연따라 큰 교당이나 교구 또는 훈련원에 원로법사님을 한분씩 계시게 하면 어떨까. 여생을 편히 보내게 하는 것만이 도리는 아니야. 그분들이 다른 책임만 안맡으면 한 역할은 할 수 있을 거야. 건강은 좋아. 적당히 운동하고 정신을 써온 때문이지. 나름대로 정한 일과대로 규칙적으로 생활하고, 병고가 있으면 바로 치료 받지』

“정산 탄백, 삼동윤리 정신 살려야”

정산종사의 탄생1백주년을 임하는 자세에 대해 한말씀 청하자, 사뭇 무겁게 입을 여신다.

『백주년사업회에서 잘 하는데 뭘. 원각성존 소태산대종사의 법통을 이은 정산종사께서 열반하실 때까지 삼동윤리를 여러차례 설법하셨어. 그 본의를 잘 알아서 일의 선후나 행사 규모, 장소 등을 선정할 때 신중했으면 좋겠어. 기념대회는 중앙총부에서 하길 바래. 잘못하면 그 어른을 모시는 대접이 아니야. 그리고 중앙총부에 삼동윤리를 기념하는 표적이 하나쯤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삼동기념관, UR기념관이라 할까』

창가에 놓여 있는 빛바랜 라디오를 보며 매스컴 교화에 대한 견해를 여쭸다.

『방송국이 생기는 것은 경사스러운 일이야. 서울보다 총부에 먼저 생기는 것도 뜻이 있는 일이지. 방송국이 새 시대를 향도하고 교법실천에 도움을 주며, 삼동윤리 정신을 일깨워줄 방송이 되고 한국적인 것을 살려내는 방향으로 나갔으면 좋겠어』

마지막으로 교무나 교도들에게 특별히 당부하실 말씀을 부탁했다.

『먼저, IMF가 아니라도 교단적으로 각성할 일이 있어. 창립정신을 체받아야지. 「창립정신 되살리어 선진유업 이어받자」(두 번 힘주어 강조하셨다) 둘째, 교단이 행정 위주로 가는 경향이 있어. 교화위주로 구조조정을 해야지. 셋째, 교단 장래를 위해 청소년교화와 재가교역자 역할 증대에 역점을 두어야 하고. 넷째, 21세기를 앞두고 새로운 각오로 나가야지 여기에 멈춰서서는 안돼. 그러자면 특히 젊은 교역자들이 열심히 뛰어야 해. 잘하도록 여건도 만들어 줘야 하겠고. 다섯째, 인재관리를 잘 해야지. 혹 잘못이 있더라도 잘 살려써야지. 여섯째, 자녀가 전무출신하여 무의무탁하게 된 부모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해. 그래야 안심하고 공도사업하지. 마지막으로 신앙호칭 문제로 혼선을 일으키지 않았으면 좋겠어. 대종사께서 「법신불 사은」이라고 하셨으니 이설(異說)이 없어야지. 과거에는 진리를 인격적으로 표현했지만 다 방편이야. 이제는 양시대에 맞게 응해야지. 어떤 호칭이든 결국 설명해줘야 이해할 것이라면 익숙해지도록 하면 돼』

종사님은 다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차 한잔을 따라주셨다.

나상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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