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 탄백사업, 우리 모두 정성 기울이자” 

〈사진〉시봉진들이 정산종사를 모시고 (뒷줄 중앙이 범산종사)

원로원 별관에 눈이 소복이 쌓인다. 빗자루를 들고 눈을 쓸고있는 원로교무님들의 손길이 바쁘기만하다.  기자의 방문을 받은 凡山 李空田종사(72)는 반가움을 표시하며 방안으로 들기를 청한다.

바깥날씨와는 달리 방안에는 훈기가 가득하다.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던 범산 종사는 요즘 생활에 대해 묻는 기자의 질문에 「휴양의 도」를 강조하신다.

『정년퇴임사 답사에서도 「세전」에 나타난 휴양의 도를 말했습니다. 쉬는 사람은 쉬는 것으로 일을 삼고, 일하는 사람은 일하는 것으로 일을 삼아야 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지금은 휴양기에 들어간 만큼 원로의 도를 잘 지키는 것이 공부임을 알고 그것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정념퇴임 이후 유유자적한 심경으로 생활하고 있는 범산종사는 그만큼 마음이 한가하다는 의미일게다. 이것은 풍류를 좋아하는 자신의 심성과 맞물려 있다. 도수 높은 안경 너머 청아한 눈빛, 부드러우면서도 단아한 말한마디 한마디에 힘이 묻어난다. 범산님의 이런 모습은 정산종사와의 만남과 깊은 연관을 갖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었다.

정산종사 모신 남다른 인연

범산종사의 원불교 입문의 인연은 각별하다. 일산대봉도, 도산대봉도, 응산종사, 고산종사등 대대로 집안어른이 원불교에 귀의했듯이 범산종사도 예외는 아니다. 이것은 그가 살아온 생애와 연관되어진다. 따뜻한 온기가 오르는 방 중앙에 앉아 조용히 눈을 감고 그동안 교단생활을 회상한다.

불연깊은 가문의 장자로 태어나 할머니 등에 업혀 영산에서 대종사를 뵈었던 범산님. 그는 원기12년 불법연구회 신흥분회에서 정산종사를 처음 뵙고 원기25년 14세의 나이에 구도의 발심을 일으켰다. 정산종사와 형산종사를 따라 출가한 그가 원광대 전신인 唯一學林 제 1기생으로 졸업한 뒤 원광 창간에 참여한 것과 조실 비서 및 정화사 사무장 겸 편수위원등을 역임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정산종사님의 법은을 누구보다도 많이 입었습니다. 10년동안 정산종사님을 전문시봉하면서 남달리 법문에 깊이 젖어들었고 그 어른을 보좌하면서 거룩한 심법등을 받들고 배우게 되었으니 이는 제 인생의 복전이요 행운이었습니다』

이 일을 기연으로 제법주인 정산종사를 보필하며 남원 백우암과 장수교당에서 「정전」 「대종경」 편수 작업을 진행했던 것은 어쩌면 필연적인 일인지도 모른다. 『원불교 교전』은 편수진 감수진 자문진들의 의지를 모아 정산종사 열반후인 원기47년 9월 26일 발간되었다. 원불교교전 발간에 대해 범산종사는 『교단 역사에 길이 남을 작업임에는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정산종사 열반 20주기를 맞이해 한편의 시를 남겼다.

우러르니 스승이요/다정하긴 임이시라/자비하신 어버이요/밝혀주신 일월이라/지금도 곁에 계시네/어허 우리 영모 법모!

범산종사는 그때의 심정으로 추모의 노래를 한구절씩 읽어내려간다. 어느새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제대로 보은하지 못한 뜻이 담겨 있으리라. 시문에도 능하여 수많은 시편을 남긴 그이지만 이 한편의 시를 지금도 기억하고 애송하고 있는 것은 일생일대에 영향을 끼쳤던 정산종사에 대한 그리움이라 볼 수 있다.

『정산종사님께서 소질을 북돋아주고 과분한 정전.대종경 편성작업을 독려하신일, 정남서원을 굳혀주시어 雲水앧跡의 단순한 생활로 이 공부 이 사업에 전일하게 하신일, 뜻을 넓히고 국한을 키워 세계주의가 몸에 배도록 알뜰히 챙기고 이끌어 주신일, 평범하고 대범하라는 「범산」법호와 이해하고 양보하라는 「無抵端下」의 법문으로 원만한 대중생활을 터득시켜 주신일 등은 정산종사님으로 부터 입은 은혜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정산종사에 대한 추원보본의 정신으로 살고 있는 그이지만 중앙문화원장과 원불교신문.월간 원광사 사장 재직시 교단 문화계에 끼친 공적 또한 적지않다. 교단 역사와 관련된 사적지 매입과 각종 사적비 비문에 각인된 글에는 교단관이 알알이 배여있다.

범산종사는 그동안 모아둔 글들을 엮은 『범범록』을 보여주며 그에 담긴 의미를 설명한다. 가슴 뭉클함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가 남긴 논설등을 읽다보니 교단의 시론을 이끌만한 위력을 가졌음을 절감했다. 일원문화 창달에 기여한 그의 공적은 가히 회자될만하다.

특히 대종경 편수작업을 비롯 불조요경, 교사, 예전, 정산종사법어, 성가, 교헌 등 7대교서를 완간하는 실무를 맡아 중추적 역할을 수행한 것과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 발의 및 세계불교도 대회와 세계종교평화회의에 참석하는등 종교간 대화와 협력운동에 앞장섬으로써 교단의 위상을 높인 것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힘 모아 뜻 모아 보은을

『평생을 교단에 봉직하면서 3가지일에 일조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7대교서 편정작업을 비롯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발족과 한국종교협의회 창립이사로 참석해 30여년동안 종교 친화에 기여했던 것등입니다』

그가 정산종사를 정신의 스승이요, 법모로 생각하고 있는 것도 이와 연관된다. 이에따라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 기념사업에 대한 그의 애정은 각별하다.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회 발족에 대해서는 몇년전부터 각계에 제언하여 분위기를 고조시킨바 있다. 정산종사 열반 30주년 기념 원불교 사상연구원 총발표에서 이미 기념사업회 발족을 제언한바 있고 성주성지 소성동 탄생가 복원 사업 기공식에서도 제언한바 있다.

『교단 염원에 의해 이제 기념사업회가 발족됐으니 여러 각도에서 정산종사님의 생애와 사상을 조명해야 할 것입니다. 20세기를 마감하고 21세기 진입을 눈앞에 둔 서기 2000년은 새회상의 개벽계승이요 아성종통인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이니 만큼 출가 재가교도들의 마음다짐과 각오가 남달라야 할 것입니다』

범산종사의 이 말 속에는 원기69년 12월 중앙문화원이 중심이 되어 추진된 소성구도지비 건립, 원기79년 10월 20일 교단의 숙원사업이었던 정산종사 탄생가 복원준공식, 원기82년 9월 탄백기념시설을 위한 성주읍 금산리 부지 매입등 정산종사에 대한 교단의 추원보본의 정성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수 있었다.

『지난 5월 교단원로들과 함께 성주성지 순례를 하면서 구도지 기념비 건립에 대한 회고담을 통해 정산종사님을 만나뵈옵는 듯한 심경을 가졌습니다. 정산.주산종사님의 진영이 모셔진 탄생가에서 탄생백주년 기념사업의 성공을 다짐하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기도를 올리면서 새회상의 법모요, 교단의 기초를 확립하신 정산종사님의 사상과 경륜을 크게 드러내고 성지성역화 등 기념사업에 재가 출가와 다함께 앞장설 것을 다짐했습니다』

범산종사의 이런 염원은 탄백기념사업회가 추진할 사업계획과 연관이 되어 있다. 이것은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을 기해서 정산종사의 거룩한 생애를 추모하고 보은하는 일이요, 건국론에 바탕한 통일사업과 삼동윤리에 바탕한 평화운동, 생명운동으로 정산종사의 사상을 크게 드러내고 실현하는 일이기 때문임을 절감하고 있는 사실이다.

『얼마전 서울에서 개최된 「남북화해와 송정산의 건국론」을 주제로 각계의 저명인사들을 초청, 학술회의를 연 것은 정산종사님께서 저술한 건국론을 현대적 의미로 재조명해 보자는데 초점이 모아졌습니다. 이것은 민족적 과제인 남북통일문제를 정산종사님의 가르침에 바탕해 방법을 찾아보자는데 의의가 있었습니다. 외부에서도 『건국론』에 나타난 사상을 비롯 정산종사님의 사상에 대해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정산종사님의 사상이 앞으로도 더욱 재조명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스승님 그리며 풍류를 벗삼아

풍류를 아는 선진을 들라면 선듯 범산종사를 말한다. 미려하고 깊은 신앙.수행관을 담고있는 그의 수많은 시문들중 「동방의 새불토」 「운수의 정」 「아침기도의 노래」 「저녁기도의 노래」등은 성가로 불리워지며 출가.재가교도들의 마음공부에 도움을 주고 있다. 요즘에도 그가 詩心으로 살고 있는 것은 풍류를 시심으로 표현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원기81년 1월 원로원장직을 마지막으로 공직에서 은퇴한데 이어 정년 퇴임한 이후에도 계속되어온 일이다.

그동안의 교단관과 회상관에 대해 시를 쓰면서 정리해 보기도 하는 범산종사는 교단생활에 영향을 끼쳤던 스승관에 대해서 피력한다.

『어린시절 4년모신 대종사님은 할아버지 스승님으로 믿음의 뿌리를 내리게 해 주셨고, 20년 모신 가운데 10년 전문시봉한 정산종사님은 아버지 스승님으로 내 공부의 줄기를 키워주시고 내 사업의 터전을 넓혀주셨고, 대산상사는 장형 스승님으로 내 공부의 개화를 촉진해 주시고 내 사업의 결실을 맺게 해 주셨습니다』

범산종사는 현시국에 대해서는 라디오를 통해 시사와 교양방송을 들으면서 진단하고 있다. IMF(국제통화기금)자금지원을 비롯 일련의 사태등도 그의 관심거리다. 그는 교단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대안을 제시했다.

『左山종법사님을 위시한 교단 구성원들이 합심해서 교단 발전을 이끌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현 교단이 발전하려면 전무출신들이 기본자세를 잃지 않고 창립정신을 되살리는 일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요즘, 하루가 시작되는 새벽좌선을 마치면 동료들과 대각전 주위를 산책한다. 정산종사 기념사업과 관계된 법설 요청이 오면 기꺼이 거기에 응한다. 정산종사 탄생 100주년 기념대회가 원만히 진행되기를 심축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정산종사님께서 장수교당에서 정화사 간판을 걸어주며 말씀해주신 「복전을 만났으니 법열속에 일을 하고 정의를 서로 주어 동련으로 정진하라」하신 법문은 공무수행을 하는동안 신앙수행의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탐방을 마치고 나오는 기자에게 교단관과 전무출신의 정신자세에 대해 다시한번 강조하신다. 범산님의 말속에는 평생을 바쳐온 교단에 대한 애정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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