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0-02-21 15:56 (금)
정산종사탄백 기획특집/ 정산종사 聖蹟을 따라서(1)
정산종사탄백 기획특집/ 정산종사 聖蹟을 따라서(1)
  • 박용덕 교무
  • 승인 1998.01.02
  • 호수 94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4백여년 儒鄕의 울을 넘어 千里 훨훨 전라도로

<사진>정산종사 고향 고산리 동네어귀에 자리한 충숙공 야계 송희규선생의 효심을 기리는 충효각이 고산리가 반촌임을 입증해 주고 있다. /고산리 손골에 위치한 충숙공 송희규 선생을 배향한 봉강서원을 찾은 필자. /정산종사의 9대조단구공을 모신 단구재. 이곳에 정산종사의 진영이 모셔져 있다.


부정기적으로 연재되는 본 특집은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을 기념하여 성적의 현장을 탐방하여 생생한 자료를 취재하고 정리하는데 역점을 둔다. 첫 탐방은 성주 고산동 출신으로 전무출신의 문을 열고 나온 원불교신문사 편집국장 송인걸 교무와의 동반 취재로 엮어졌다.

유배지 완주 高山을 잊지 못하는 충숙공 야계 송희규

김천 IC에서 905번 도로를 타고 성주읍으로 향해 30여분 달리면 신거리재 넘어 용봉동이 나온다. 여기서 2.5km 들어가면 소성동. 탄생가 이야기는 다음 일로 미루고 우리는 고산동을 먼저 취재키로 하였다. 곧바로 다리 하나를 지나 직진하면 봉정동. 그리고 동포동 갈개에서 우회전하여 시멘트길을 따라 잠시 들어가면 고산동 입구, 작은 동산에 노송이 몇 그루 운치있게 서 있는 가운데 충숙공의 충효각이 아담한 자태로 자리잡았다. 400여년 의와 효와 절의 전통을 지켜온 고산정의 가풍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된다.

새로 단장한 충효각은 신구 비석이 양립해 있다. 반동강이 난 구 비신 옆에 옛 기록을 다시 복원하여 놓았고 그도 마땅치 않은지 충효각 안에 다시 오석으로 되새겨놓았다. 세월의 풍상을 두려워 함인지 아니면 사람을 믿지 못하여서인지 비각의 입구는 자물쇠로 굳게 잠겨 있어 우리는 담너머 글을 읽다가 그도 만족치 못하여 카메라에 담았다.

야성 송씨 일가가 성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고려 충목왕 때(1344~1348), 시조 야성군의 10세손 송구가 재상어사로 초전면 문덕리 송천을 지나다가 산세와 경관이 뛰어난 이곳에 터를 잡게 되면서부터이다. 문덕동에서 산모롱이를 하나 돌면 고산동, 후손들이 여기에 터를 잡고 살게 된 것은 그로부터 200여년 뒤인 조선조 중종때 충숙공 야계 송희규(忠肅公 倻溪 宋希奎 1494 성종25~1558 명종13)대이다.

송희규는 중종 8년(1513)에 관계에 진출하여 여러 벼슬을 거치며 정치적 파란을 겪게 되고 종내는 파직을 당하기도 하였다. 명종 즉위년(1545)에는 대구도호부사로 복직하였고, 장령이 되어 명종의 외숙인 윤원형의 전횡을 탄핵하다가 을사사화에 휘말려 귀양 길을 떠나게 되었다. 이때 그가 귀양 간 곳이 전라북도 완주군 고산면, 뒷날 그의 13세.14세손 구산.정산 부자대에 이 근방으로 이주하여 낙도하게 되는 기연이 되었다. 고산은 익산에서 자동차로 불과 30분 거리, 한 때 대종사께서 이곳에 총부를 정하기 위해 둘러본 곳이다.

완주 고산의 유배 생활에서 풀려난 송희규는 문덕리 송천에서 가족들을 이끌고 횟골 넘어 고산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447년간 충숙공 일문의 가계를 이룬다. 1551년 송희규는 고산에 백세각(百世閣)이라는 재각을 짓고 학문에만 전념, 권모와 술수가 횡행하는 정계에 다시는 진출하지 않는다. 5년간의 유배 생활에서 얻은 것은 정치 생활에 대한 환멸뿐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소중한 깨달음이었다. 그래서 그는 유배지의 지명을 따 고산동의 동명 「孤」에서 「高」로 바꾸어 高山洞이라 하였다.

이로부터 그의 도덕이 널리 떨쳐 인근 사림에서 발길이 잦고 일문의 만세를 기린다는 가풍 있는 마을로 번성하였다. 송희규는 퇴계와 율곡으로부터 학덕이 깊다는 칭송을 받았고, 李晦齋 權욼齋 등과 교의가 두터웠다. 남달리 효우가 장해 그가 죽은지 4년 뒤 조정에서 정려와 효우비를 세워 주었으며 1595년 직첩을 환급받았다. 시호는 충숙공, 봉강.천곡 양 서원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야계선생 문집』이 있다.

고산정 야성 송씨 문중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학문을 가까이 하여 충숙공 이후 17세손까지 끊이지 않고 문집을 간행하였으며, 의와 효와 절을 중시하여 일제 치하 기미년에는 고산정 백세각 유림이 주축이 되어 만세 운동을 전개하였다.

봉황이 훼를 치고 알을 낳는 계명동

고산 1동에는 봉황이 알을 낳는 형국이라는 봉암산(鳳岩山‥속칭 벙디미산)을 주축으로 음지뜸과 양지뜸 두 마을이 있다. 그래서 이 두 마을에는 우물이 없고, 봉황의 알을 깨서는 아니된다는 믿음 때문에 동네 아낙들은 머리에 물동이를 이고 고개 너머에서 물을 길어 먹었다.

고산 2동은 손골, 기민동, 닭실 여기서부터는 시멘트 포장이 끝나고 진창길이다. 1동과 2동을 경계로 붉은 깃발을 꽂아놓았는데 불원간 구미와 달성 구지간을 잇는 고속도로가 뚫린다는 것이다.

고산동 손골에는 충숙공의 묘원이 있다. 본디 이 곳에는 손씨들이 살고 있었는데 충숙공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되자 어른을 모시는 곳에 우리들이 살 수 없다하여 이주하고 그 이름만 남았다. 1838년에는 충숙공을 기려 봉강서원이 섰다. 현판의 글씨는 명필 번암 채제공의 것으로, 대원군 때 전국의 서원을 혁파할 때 봉강서원도 예외일 수 없어 서당으로 격하되고 현판의 글씨도 바뀌어, 「堂」자만 다시 파 짜넣은 흔적이 현판에 그대로 남아 있다.

고산동의 가장 안창 마을 닭실에는 충숙공의 5세손(정산종사의 9대조) 단구공 송세필(1607 선조40~1684 숙종10)을 기리는 단구재 봉곡서당(丹邱齋 鳳谷書堂)이 있다. 새로 단장한 이 재각의 오른쪽 방에 정산종사의 영정이 걸리고 작은 글씨로 이렇게 설명을 달았다. 「원불교 송규 종사 영정. 단구공 9세손 홍욱」 미상불 자랑스런 후손이 아닐 수 없다.

고산동은 동네 어귀의 충효각을 비롯하여 재각과 서당이 많다. 고산동 1구 음지뜸의 고양서당과 송간재(송간공파 재실), 양지뜸의 용계서당(龍溪書堂‥鳳陽齋)과 앙산 송홍눌의 숭양정사(嵩陽精舍), 고산동 2구의 손골 충숙공 묘원과 봉강서원(鳳岡書院), 닭실의 봉곡서당(丹邱齋) 등이다.

닭실은 또 봉곡(鳳谷)으로 표기한다. 장차 봉황이 날 것을 예견한 지명이다. 닭실 아래 마을은 계명동(鷄鳴洞;속칭 기민동), 닭이 훼를 치고 알을 낳고 꼬기오 하고 운다는 마을이다. 고산동의 여러 마을 중 서원과 재각이 없는 곳은 오직 계명동 한 마을 뿐, 이곳에서 정산종사의 부친 구산 송벽조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결혼하였다. 계명동 뒷산에 정산종사의 고조부 증조부의 선영이 모셔져 있다. 10여호 남짓한 계명동에는 서당이 없었지만 정산종사의 조부 소와 송성흠(韶窩 宋性欽)은 종가로 내려가 백세각에서 학문을 익혔다. 그는 당시 석학 사미헌 장복추 문하에서 학문을 익혔고 뒷미 홈실 넘어 학업이 빈약한 처가동네 소야(소성동)로 이사하여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다. 「소와」라는 아호가 그렇게 하여 생겼다. 봉황이 나래를 펴고 구만리 장천을 난 곳은 계명동에서 뒷미 홈실 넘어 십리길 소성동에서의 일이다.

이제 산천은 옛같지가 않다. 농지 정리라는 미명 아래 봉황이 깃든다는 닭실에는 온통 불도저, 포크레인이 산천을 짓이겨놓아 옛 모습은 간 데 없고 바둑판처럼 네모 반듯한 규격화된 전답으로 변형되었다. 유서 깊은 재각과 서원들 주위로 갓 쓰고 양복 입은 꼴불견의 양옥들이 하나둘 들어서고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아침나절 날씨만큼이나 고산동의 재각들은 자물통이 굳게 채워져 우리들의 출입이 뜻같지 못하였다. 한낮의 태양이 중천에 올라 길은 녹아 진창이 되었으나 추위탓인지 마을의 고샅길은 인적조차 드물었다.

4백여년 유가의 울을 넘어 다시 전라도로 온 14세손 송규

고산동에 충숙공이 정착한지 4백여년 동안 그 후손들은 송간공파, 고산공파, 단구공파, 용계공파, 첨정공파, 동지공파, 주부공파 등등 제파로 분파되며 종문의 가풍이 백세각을 중심으로 면면이 전승되었다.

1918년, 충숙공으로부터 14세손에 이르러 종문의 일곽에서 일대 변혁이 일어나게 된다. 백세각(宗家)의 고양서당 공산 문하생이었던 송규가 오랜 동안 가문의 정신적 지주였던 유학의 벽을 뚫고 고향을 떠나 소태산 대종사를 만나고 새로운 정처를 확보한 것이다. 송규(宋奎)는 14대조 송희규(宋希奎)가 적소 생활을 잊지 못하던 전라도로 다시 돌아가 조선 현실에 맞는 이상적인 도덕 공동체 생활 개척에 앞장 섰다. 참으로 이상하고 희귀한 일이다. 대종사, 어찌하여 경상도에서 찾아온 초립 동자에게 그의 14대조의 이름을 따 「규(奎)」라는 법명을 주었을까. 십여년 조롱 속에 갇혀 살던 가문의 울타리를 과감히 벗어 던지고 천리를 단숨에 훨훨 날아 전라도 스승 앞에 오체 투지하여 사부님으로 받드는 천연 도꾼 송도군(宋道君‥정산종사의 본명), 그가 14세에 읊은 다음의 출가 포부시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海鵬千里翔羽羽 籠鶴十年蟄鬱身.

그는 한번 고향을 떠나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며 한 회상을 지도하는 종법사 위에 올랐어도 선산에 조선(祖先)의 명복을 기리는 묘비조차도 세우지 않았다. 그는 처자 불고, 가사 불고하였지만 일가족이 일원 회상에 귀의하였다. 슬하에 두 딸 뿐이었으나 종족 보호 본능의 차원에서도 훨씬 초월하였다. 정산종사는 종족 관념을 타파하고 인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하였다. 지역적 보수 성향이 강한 영남 출신으로 드물게도 그는 호남에 정착하였고, 종단의 최고 지도자로서 성공적인 교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정산종사는 씨족과 지역의 국집을 벗어나 시방오가 사생일신의 지경에서 일원주의 정신에 입각하여 사해 동포(四海同胞) 윤리를 주창하였다. 정산종사는 만년에 삼동윤리 게송를 발표 「한울안 한이치에 한집안 한권속이 한일터 한일꾼으로 일원세계 건설하자」(同源道理 同氣連契 同拓事業)는 법문을 남겼다.

〈교무, 원광대 중앙도서관 원불교자료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