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밭재 마당바위 - 의심 해결하려 5년 동안 기도정성

▲ 대종사 기도터 심밭재 마당바위 가는 길.

삼밭재 마당바위는 소태산대종사께서 산신령을 만나려는 원(願)을 세우고 5년 동안 기도를 드렸던 장소다.

영촌에서 삼밭재를 가는 길은 독다리를 지나갔다고 하는데 독다리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구호동을 지나 골짜기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예전에 화전민들이 터전을 닦고 살았던 큰 골을 지나게 되는데, 이곳에 개미절터가 있었다고 한다. 개미절터 자리에는 아직도 수령이 몇 백 년은 됨직한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는데 이 나무를 지나 삼밭재에 오를 수 있다.

소태산대종사가 삼밭재로 기도를 가게 된 사연은 이렇다.

어릴 적 우주와 자연 현상, 인간사에 대한 의심을 풀 길이 없어 막연하던 차에 11세 되던 가을, 아버지를 따라 선산이 있는 영광군 군서면 마읍리에 시제를 모시러 갔다가 산신에게 먼저 제물을 바치는 모습을 지켜보고 산신의 영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되어 산신을 만나 의심을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 대종사 삼밭재 기도 당시 토굴이 있던 곳. 현재 기도실 부근이다.

개미절터를 경유하여 삼밭재 정상에 오르는 길에 도자기 파편들과 기왓장을 발견할 수 있다. 조선조에 이곳 영광 삼밭재 근처에서 궁궐에 그릇을 납품하던 가마가 있었다고 한다. 그릇을 굽는 가마가 어찌된 연유로 깊은 산중에 있었는지 사뭇 궁금하다.

당시 길용리 인근에서는 개미절터에 있는 샘터가 기도터로 유명했다고 한다. 처음 대종사가 기도를 올리려고 한 곳도 이 샘터였는데 바로 개미절터 부근에는 화전민들이 살고 있었기에 혼자 조용히 기도를 올리기에는 부적합하였다. 그리하여 인적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개미절터 위에 있는 삼밭재로 기도를 다녔다고 한다.

당시 대종사는 다녀야 하는 서당에는 가지 않고 삼밭재 치성을 통해 산신령을 만나 모든 의심을 풀고자 하는 아들을 위해 어머니는 깨끗한 음식을 장만해 주기도 했다. 아버지는 외삼촌 칠산(유건)을 시켜 마당바위 옆에 조그마한 초당을 지어 주기도 하였다. 대종사는 어머니께서 챙겨주신 음식을 마당바위에 진설하고 사방을 향하여 배례를 하며 산신령 만나 뵙기를 원하는 5년여 간의 기도정성에도 불구하고 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현재 삼밭재 기도실은 대종사께서 마당바위에 기도 적공을 하실 때 옆에 지었던 초막터에 세워진 것이다. 이 기도실은 대종사 탄생백주년 성업봉찬사업으로 명타원 김만주화 교도의 후원에 힘입어 원기74년(1989) 10월12일 기공하여 21일 상량한 뒤, 원기75년 10월9일 준공 봉불을 하였다.

삼밭재 기도실에 걸려있는 기도실 기(記)는 다음과 같다.

삼밭재 기도실 기
이곳은 소태산대종사께서 우주와 인생의 모든 의심을 해결하고자 11세 때부터 5년간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기도의 정성을 올리던 성적지요, 부친 회경(晦傾)공께서 움막을 지어드려 적공케 하셨던 유서 깊은 도량이다.
이를 깊이 기념하기 위하여 대종사 탄생백주년 성업봉찬사업의 일환으로 명타원 김만주화(월화: 인간문화재 제39호)님이 특별한 발원과 정성을 바쳐 목조와가 14평의 기도실을 여기에 짓고 주위를 정화하였다.
거룩하도다. 소년 대종사의 기도의 정성이 마침내 대각의 원동력이 되었듯 이 공덕 또한 법계에 널리 사무쳐 일체중생과 함께 성불제중의 대원을 이루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원기75년 10월9일, 소태산대종사 탄생백주년 성업봉찬회
찬:항산 김인철, 서:이산 박정훈, 공감:과산 김현

삼밭재 마당바위와 관련된 글은 〈회보〉 제39호(원기22년 11월)에 류현학 선진이 마당바위 등반기(登攀記)라는 글을 남겼는데, 당시에 정산종사를 비롯한 선진들과 함께 은선암 쪽으로 올라가는 이야기가 목가적 풍경으로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다.

영광을 내려가는 길이면 마당바위를 일차 구경하려니 하는 마음은 진즉부터 나의 가진 바로되 이때까지 그 소원을 달성할 기회를 얻지 못하던 바, 거번 우연히 귀성하게 되매 그 뜻을 홀로 이룰 때가 도래하였음을 즐거워하였더니 길용리에 내려간 그 익일인즉 팔월 이십오일 교리강습회 수강원의 일부에서 일일(一日) 원족(遠足)의 동의가 날 제 나는 어린 아이와도 같이 기뻐하였으니 더욱이 그 목적지가 나의 바라고 바라던 마당바위였던 것이다. - 중략 -

산골의 물은 숲을 헤치고 돌을 넘고 흙을 뚫고서 흐르고 또 흐르듯 마치 "공부자여, 마땅히 진리의 탐구를 위해서는 만난을 헤치고서 정진 매진하라" 함과도 같다. 산길은 갈수록 험하고 또 험하다. 깎은 듯한 비탈길, 쳐다보니 성벽 같은 언덕이요 내려다보니 수백 길의 절벽이라 나는 마치 진퇴양난의 곤경을 당하여서도 굴함이 없고 넘어짐이 없이 일을 헤쳐 나가는 한사람의 인생 투사와도 같이 숲을 뚫고 바위를 넘고 구렁을 건너고 높은 곳을 기어올라 얼마를 가고 가노라니 광활한 시야가 전면에 전개되며 평평한 천연암이 널리 깔린 정상에 이르렀다. 여기가 목적의 마당바위란다. 모자를 벗고 경의를 표한 후 바위틈 새는 물에 마른목을 축이고서 고요히 생각하니 감개가 실로 무량이다.

산신을 만나시기 위하여 음식을 차리시고서 동서남북으로 공경 예배하시던 종사주의 성자(聖姿)가 눈에 보이는 듯, 소정의 목적을 달하시기 위해서는 침침칠야(浸浸漆夜) 풍우 한설을 불구하시고 이 산을 오르내리신 그 고초와 그 열성은 이 좁은 가슴에 치밀려 그 복잡한 감정은 정히 억제키 어렵다.

바라보니 전면은 황금의 물결 치는 논과 밭, 후면은 저 멀리 넘실거리는 황해의 거친 창파 그 주위로 둘러싸인 멀고 가까운 대소 군봉은 이 마당바위를 향하여 엎드려 절 하온 듯 정산 선생님께서는 좌우 봉만을 가리키며 저기가 촛대봉 여기가 옥녀봉 중앙은 노루봉 하시며 옛날을 회상하심에 만감이 가슴에 새로우신 듯 감격 깊게 설명하신다.

우리 종사 구도하신 마당바위 여기라네,
옛 일을 회상커니 감회 다시 새로워라.
둘러싸인 적고 큰 산 이곳 향해 엎드린 듯
뒤엔 창해 앞엔 광야 경개 또한 좋을시고
널리 깔린 바위 위에 말없이 서노라니
싸늘하다 가을바람 이내 몸을 스쳤어라.
종사 옛일 듣자온대 내 가슴 설레어라.
진리 찾은 나도 또한 그 본받아 행하여서
열과 성 다하도록 힘써 노력하옵고저.
▲ 대종사 산신을 만나기 위하여 음식을 진설하고 사방을 향해 배례하던 삼밭재 마당바위.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명상과 사색에 잠겨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재촉하여 허둥지둥 산을 나려오니 산비탈 초가집에 저녁연기는 길게 가늘게 바람에 하늘거리는데 초동은 바쁜 걸음으로 집에 돌아가더라.

삼밭재 마당바위에서 구호동 쪽에 바위에 대해 대종사는 성인이 오기를 바라며 기도를 하였던 바위라 하여 망성암(望聖岩)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 삼밭재 기도를 통해 대종사는 원하던 산신령을 만나지 못하였으나 5년간의 기도 정성을 통해 원력이 더욱 굳어졌던 시기였다고 한다. 원기 20년대 대종사가 시한(겨울)이 되면 솝리에서 영산에 행가하여 법회를 보았다. 대중들과 함께 이바리골로 삼밭재 마당바위에 올라 영산 인근 회원들에게 법설을 하고 함께 물욕충만 성가(불법연구회가)를 구수산이 떠나가도록 불렀다는 회고를 통해 대종사와 삼밭재를 추억하고 있었다.

<영산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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