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 '공동체의식' 융합된 한국 고유의 문화 아이콘

赤脚僊僊血溢腔(적각선선혈일강)
勇如九鼎1一時扛 (용여구정일시강)
一圈平沙芳草際(일권평사방초제)
怒牛犄角赴雙雙(노우의각부쌍쌍
)

붉은 다리 훨훨피는 가슴에 넘치고
용기는 구정을 단번에 들기나 할 듯
방초 푸르른 평평한 모래 벌판에
성난 소 뿔로 비비며 쌍쌍이 달려든다.
(1 구정 : 중국 하나라 우왕이 아홉주에서 거둬들여 만든 솥)

1921년 최영년이 씨름하는 역동적인 모습을 각저희(角觝戱)이란 칠언절구로 표현한 한시다. 우리나라의 민속씨름에는 싸움을 뜻하는 전투성과 흥을 뜻하는 유희성, 즐김을 나타내는 오락성, 경쟁을 뜻하는 경기성,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성이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와함께 다양한 민속경기는 놀이 및 종교적 형식이나 세시풍속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씨름의 유래
집단신에게 무사태평과 오곡이 풍성하게 수확되길 기원하면서 그 신을 즐겁게 하는 동시에 신의(信意)를 탐지하기 위해 발생 전래되었던 신사행위의 일종으로 신전에서의 농악, 탈춤, 굿 등이 신을 즐겁게 하기 위한 오신(娛神) 행위였다면 신전에서의 씨름, 줄다리기, 편싸움 등은 신의를 탐지하기 위한 경기였다고 볼 수 있다. 신전(神殿)의 여러 행사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놀이로 민간에게 유포되고 보편화됨으로써 그 신성성이 약화되고 오히려 유희성과 무희성이 강화된 것이다. 일반 민초들의 놀이가 되면서 유희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놀이로 성장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4세기경 만주 길림성 지안현의 고구려 고분인 '각저총(角抵塚)' 벽화에 씨름하는 모습이 있는데 큰 나무 밑에서 두 선수가 벌거벗은 몸에 샅바만을 걸친 채 손을 상대의 샅바에 돌리고 머리를 서로 맞대고 서로 힘을 쓰는 모양새다. 한 사람은 어깨에 힘을 잔뜩 넣고 있어 아래쪽을 향하고 상대방은 위로 향해 입을 약간 벌려 거친 숨을 쉬고 있는 듯하다. 웅장한 체구를 가진 두 역사의 역동적인 자세가 잘 묘사되어 있다. 두 사람의 역사가 맞잡고 있는 옆에 지팡이에 몸을 지탱하고 구경하고 있는 백발 수염의 노인과 앞다리를 세우고 목이 마른 듯한 표정으로 누런 개가 한 마리 앉아 있다. 이 노인이 심판을 담당하는 듯 하다. 이렇듯 고구려인들에게 무인계층의 주요 교과과정으로서 기능과 자신의 체력을 시험할 수 있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각저(角抵)란 씨름의 다른 이름으로 씨름벽화가 있다고 해서 각저총인 것이다. 그 외 씨름의 다른 이름은 각력(角力)·각저(角觝)·각희(角戱)·각력희(角力戱)·상박(相樸)·각희(脚戱) 등으로 불려졌다.

씨름이 문헌상 처음 나타난 것은 〈고려사〉에서 '왕이 정무를 폐신(嬖臣)인 배전(裵佺)과 주주(株主) 등에게 위임하고 날마다 내수(內竪)와 더불어 씨름을 하여 위와 아래의 예가 없다'하였고 '충혜왕이 용사를 거느리고 씨름을 구경했다'고 쓰여 있다. 또 '공주가 연경궁으로 옮기니 왕이 주연을 베풀어 위로하고 밤에는 씨름을 구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조선시대는 유교적 관료국가로 국민생활의 기본적인 규범의식은 〈주자가례〉에 근거를 두고 삼강오륜은 도덕율이 되어 귀족적 성향을 띠는 오락(바둑, 쌍육)등은 하층 백성들에게는 통제를 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신분제도의 붕괴와 사대부로부터 배격된 유희·오락은 귀족들의 관람대상으로부터 아동이나 서민들이 즐기는 전승놀이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 남산골 한옥마을에서 트라스포 앤 씨름시범단

단오날의 대표적인 민속경기

단오날의 대표적인 민속경기로 씨름이 단연 꼽힌다. 또 상원(上元), 3월 삼짇날(3월3일), 4월 초파일, 7월 백중일(百中), 8월 한가위, 9월 중양일(重陽日) 등과 같은 명절날에도 기쁨을 나누기 위해 즐겨 씨름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국세시기〉, 〈열양세시기〉를 통해 보면 각각의 절기에 맞는 세시풍속(歲時風俗)의 민속놀이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씨름은 민중의 폭넓은 확대로 세시풍속 외에도 생활 속에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있으며, 전근대적 농업사회에 상부상조와 애향심을 고취하는데 주된 역할을 해 온 것이다. 조선후기 씨름은 '어울린다'라는 유희의식과 힘과 기술을 겨룬다는 힘겨루기, 그리고 씨름판의 흥을 돋구는 공동체의식이 융합된 한국 고유의 문화체계 양상을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씨름판은 누구에게나 열려진 공간이며 함께 살아가는 땅위에 절기마다 펼쳐지는 감성적 행위매체였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 : 1749~1807)이 지은 당시 서울의 세시풍속지인 <경도잡지>를 보면 5월 단오조(端午條)에 '서울의 소년들이 남산 기슭에 모여 서로 씨름을 한다. 그 방법은 서로 대하고 구부려 각각 오른손으로 상대자의 허리를 잡고 왼손으로는 상대자의 오른쪽 다리를 잡은 다음, 일시에 일어나면서 서로 번쩍 들어 메어친다. 여기에는 내국(內局), 외국(外局), 윤기(輪起) 등의 여러 가지가 있다. 중국인이 이를 본받아 고려기(高麗技), 또는 요교라 한다'고 적혀있다. 여기서 내국은 배지기, 외국은 등지기, 윤기는 딴족거리의 씨름 기술을 말한다. 또한 도결국(都結局)이란 말이 있는데 '판막음'으로 그 판에서 힘이 세고 손이 빨라 연전연승하는 사람을 지칭해 썼다. 중국인이 이를 본받아서 '고려기'라 했다는 것은 씨름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씨름의 여러 방식이 중국으로 전해졌다는 것으로 이해된다.

'충청도 풍속에 노소를 막론하고 7월15에는 거리에 나가 마시고 먹으면서 놀고, 또 씨름놀이도 한다'라고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는 조선후기의 농촌의 일상을 밝혔다. 7월15일 중원절(中元節)은 농촌에서 '호미씻이'라 하여 농사일에 지친 피로를 푸는 날이다. '호미씻이'는 논밭을 매던 호미를 씻어 두고 놀기 때문에 생긴 이름으로 풋굿·초연(草宴)·머슴날·농부날이라 다르게 부르기도 한다. 여름농사가 거의 끝난 음력7월 보름 무렵 호미를 씻어 걸어두고 날을 잡아 음식을 장만해 산이나 계곡을 찾아 농악을 울리며 춤과 노래로 하루를 즐겼다는 것이다. 더불어 마을에서 농사가 잘된 집의 머슴을 뽑아 1년의 수고를 치하하고, 삿갓을 씌워 황소에 태워서 여러 머슴이 에워싸며 노래하고 춤추며 마을을 순회하면 그 집주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술과 음식을 대접하기도 했다.

씨름판이란 씨름경기가 벌어지는 장소를 의미한다. 민속으로 행해졌던 씨름은 규정된 경기장이 없고 동네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마을 한복판이나 느티나무 정자가 있는 곳 등으로 둥글게 모래를 깔아 적당한 원을 그려 표시하며 구경꾼들이 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씨름대회가 열리면 다른 민속놀이도 어우러져 온갖 장사꾼들이 모여들어 씨름판 주변은 난전(노점)이 형성돼 축제로 이끈다.

현재와 같은 씨름이 정착한 시기는 1927년 '조선씨름협회'가 창립되면서 근대의 민속경기로 발전하게 된다. 이때 구전과 체험을 통해 전승되어 오던 각 지방의 경기방식이 차이가 있었다. 경기 이북지방에서는 다리샅바에 팔꿈치를 끼는 망거리 씨름, 충청도 지방은 허리에 샅바를 매는 통씨름, 전라도 지방은 왼쪽다리에 샅바를 매는 오른씨름, 경상도 지방은 현재 전국으로 통용되는 왼씨름이 해방 이후까지 전해져 왔다. 그 후 1959년 6월 제1회 전국장사씨름대회부터 각 지방의 씨름을 통합한 규칙을 만들어 왼씨름으로 전국단위 대회를 열며 지금과 같은 경기씨름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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