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5일, ○번 버스가 달린다

무탈한 가운데 종종 들려오는 인연들의 기쁜 소식
오늘도 삶의 운전대는 어디론가 향하고
마치 365일 무탈한 마음을 만들기 위해 운전한다

▲ 출고 된 지 8년이 된 이 버스는 573,759㎞를 달렸다.닦고, 조이고, 기름쳐서 아직도 쌩~쌩~ 달린다고.

경북 성주로 향하는 길, 성주 읍내가 한 눈에 펼쳐지는 산등성이에 섰다. 온통 비닐하우스. 반짝이는 햇살에 은빛바다가 펼쳐진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설마 참외밭 하우스일까하는 궁금증이 일어났다. 길가는 아저씨를 불러 세웠다.
"저기, 저 하우스는 다 뭐예요."
"참외밭이지 뭐 다른거 있겠습니까. 올해는 눈이 많이 와서 연료비도 많이 들고, 일조량도 짧아 농사가 예전 보다 못해요. 농민들만 이래저래 힘들지요."

아저씨는 한마디 질문에 몇 개의 대답을 쏟아냈다. 새삼 성주참외가 명성을 얻기까지의 수고로움이 전해지며 달콤한 성주참외 향기를 맡기까지의 과정이 느껴진다.

그 누군가의 자가용처럼

이곳 성주에는 참외 말고도 유명세를 타는 것이 있다. 성주 군내 버스인 '○번 버스'이다. 글을 모르는 할머니들은 이 버스를 '똥글뱅이 버스'라고 부른다.
일원상인 ○번,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하던 차에 ○번 버스를 찾아 성주군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매표소를 들러 3시에 출발하는 '작은동'가는 버스를 찾았다. 출발 대기 중인 버스엔 천진 성품을 풍기는 스님과 아주머니 한 분, 그리고 아저씨와 버스 기사 (이현복·56)가 전부다.

라디오에서 3시를 알려오자 버스가 출발했다. ○번 버스는 이내 성주읍내를 벗어나 33번 국도를 향해 달렸다. 작은 산등성이를 넘자 S자를 그리는 내리막길이 나타났다. 안전벨트가 없어 앞좌석을 더 힘껏 잡아야했다.
마을을 향해가는 버스 안에서 작선마을에 거주하는 김송이 할머니(가명·74)에게 물었다.

"이 버스는 왜 ○번 버스예요."
"늘 새롭게 사람이 태워야 하니 ○번 이제, 새칠로 말여."
아주머니 말에 의하면 이 버스는 그냥 ○번이 아니었다. 사람이 타고 내리고, 텅 빈 버스가 될 때 또 어느 마을에서 한 사람이 타고 내리고, 반복을 하니 ○번이란다.

미소를 띠고 조용히 앉아있는 스님에게 물었다.
"어디까지 가세요."
"우리 절까지 가지요."
"어느 절이신데요. 이 ○번 버스가 절까지 갑니까."
"……"

말 없음으로 대답을 하는 스님은 "내가 이 버스타고 종점까지 가 봤는데 골짜기까지 1시간이 걸려요."
"아, 그러셔요."
흔들리는 버스에서 몇 마디 나눈 사이 '만덕사' 표지판이 나타났다. 스님이 좌석에서 일어섰다. "일 보고 가시오"라는 인사를 남기고 총총히 사라지는 스님. 마치 ○번 버스는 스님의 자가용 같아 보인다.

상상 속의 이미지처럼

○번 버스가 달리는 길엔 멀리 가야산 풍경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길 왼쪽으로 아름다운 계정천이 흐르고, 봄비를 흠뻑 맞은 벚꽃나무가 움을 트려 토실토실 붉은 꽃망울이 봉긋하다.
화함-작선-보월마을 버스정류소에서 승객 2명이 내리고 다시 3명의 승객이 오른다.

오르는 승객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왜 사진 찍느냐'고 무안 줄까봐 미리 '사진 좀 찍었노라'고 양해를 구했다. 아니나 다를까 보월마을 박나리 할머니(70)가 "왜 사진 찍고 그래, 늙은 모습 뭐가 좋다고 찍느냐"며 따지려 할 때, 먼저 탄 김분례 할머니(72)가 "교통조사 나왔다요"하고 물었다. 머뭇거릴 사이도 없이 "아- 그렇죠. 이 ○번 버스 타시는 분들은 어떤 분인가 궁금해서 나왔답니다"하고 얼버무렸다.

박 할머니는 시골에 꽃과 나무가 지천일 텐데도 검은 봉지에 푸른 꽃나무 서너 그루가 있다. "어떤 꽃이 피느냐"고 질문하자 "돈나이 꽃이 핀다"고 대답했다. 앞 자리에 앉아 있던 거뫼마을 이성무 할아버지(71)도 이름이 생소했던지 "이름이 뭐- 돈나이 꽃?" 이라고 반문한다. 박 할머니는 "이 나무를 집안에 심으면 돈이 마르지 않는다고 해서 돈나이 꽃이라네"하며 기대감이 가득한 얼굴표정을 지었다.

취재 후, '과연 그런 꽃이 있을까'싶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검색이 안된다. 아마도 그 꽃은 박 할머니만의 상상 속의 꽃으로 마음의 위안을 주며 부자를 만들어줄 꽃인듯하다. 박 할머니는 이 할아버지에게 "내일은 내 보고 싶다 하지 말고 잘 가이소"하며 작별인사를 나누며 버스에서 내렸다. 부자가 되게 해 줄 '돈나이 꽃'과 함께. 할머니가 내린 마을 돌담이 참 아름다웠다. 아마도 돈나이꽃이 저 돌담 곁에서 핀다면 돈보다 더 소중한 마을 정경을 선사할 것 같다.

▲ 보월마을 박나리 할머니가 집안에 돈이 들어온다는 돈나이 꽃을 사들고 승차했다.

비포장 길, 일심공부가 절로

보월마을을 지나 덕골-개티-배티로 향하는 길. 외길이 나타났다. '설마 저 좁은 도로를 버스가 가려나. 벌써 종점인가'하는 생각이 스칠 때, ○번 버스는 좁은 임도인 듯한 낮은 산길을 오르기 시작했다.
승객으로 혼자 남은 이 할아버지가 심심할까봐 덕골마을 김송암(75) 할아버지가 버스를 세웠다. 자연스럽게 인사를 나누고 "어디 가시는 길이냐"는 물음에 "대구를 간다"고 대답한다.

김 할아버지에게 ○번 버스에 대해 물었다. "대한민국에서 1등 버스이지 뭐. 우리와 인사하는 사람은 버스기사님 뿐이라요. 무척 고맙죠. 우리 태워주고 발 노릇 해주는 거는 이 버스뿐이라예."

아슬아슬 산길을 달리는 버스는 거침없이 해발500m되는 용암면 작은리에 다달았다. 이곳이 이 버스의 종점 작은동. 하지만 잠시 쉴 여유도 없이 버스는 머리를 되돌렸다. 그런데 왔던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반대편 방향에도 성주 갈 손님이 있으니 그 쪽으로 해서 성주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번 버스는 편도인 셈이다.

왔던 길과는 달리 버스가 가는 길은 비포장 길이다. 움푹 패인 임도를 향해 또 거침없이 달린다. 온 몸이 흔들리고 정신을 쏙 빼 놓는다. 대종사께서 "변산 청련암 뒷산을 넘을 때 험한 재를 넘으니 일심공부가 절로 되더라"는 의미가 이해되는 순간. 독경이 저절로 되어졌다.

○번 버스 기사 아저씨는 "아직은 풀이 무성하지 않아 길이 좀 넓어 보이지만 여름에는 풀이 길을 덮어 운전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거주하고 있어 운행을 안 할 수도 없는 일. 오전10시와 오후3시 편도로 운영하는 것만도 주민들의 편의를 봐 주는 고마운 버스인 셈이다.

흔들리는 비포장 길을 벗어나 까치산 옆 찬바람맞이산 입구에 다달았다. 성주읍내 딸집에 간다는 박막내 할머니(73)가 승차한다. 박 할머니는 "성주 아랫녘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이곳으로 빠져 나가 찬바람맞이산이라 한다"며 자상한 설명을 해 준다. 아직은 이곳에 집이 있어 오전 10시차로 들어왔다가 오후4시차로 다시 나간다는 것이다.

박 할머니는 "공기가 좋고, 고향인데 쉽사리 떠날 수가 없다"며 현재 13가구가 살고 있는데 주로 70대이고 73살인 당신이 가장 젊다고. 이때 덕골마을에 사는 김 할아버지가 거든다. "우리마을은 3가구 밖에 안 살어. 꿀벌 키우고, 흑염소 방목하며 큰 탈 없이 살고 있제."

무탈한 가운데 종종 들려오는 인연들의 기쁜 소식에 오늘도 삶의 운전대는 대구로 향하고, 성주로 향하는가 보다. 마치 365일 무탈한 마음을 만들기 위해 운전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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