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그대로 완전한 모습

▲ '불상'(부처님의 생각을 비운 모습)

옛날 사람들은 하늘은 완전하고 지상은 불완전하다고 생각했다. 하늘에 있는 별들은 완전한 것이므로 원운동을 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원(○)은 완전성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신화시대를 거쳐 아리스토텔레스의 고대과학까지 유지되었고, 근대과학의 여명기인 17세기 케플러가 나올 때까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그런데 케플러는 행성의 궤도가 원이 아니라 타원임을 밝혔다. 이것은 하늘은 완전한 영구불변의 세계이며, 지상은 불완전하여 생성소멸의 변화가 끊임없이 일어난다는 오랜 믿음을 깨뜨린 획기적 사건이었다. 이로써 천상계와 지상계를 구별하던 대전제가 깨졌다. 천상계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환상이 부서졌고, 천상이나 지상이나 동등한 자연이라는 근대과학적 세계관이 자리잡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원은 완전한 모습이고 다른 모양들은 불완전한 모습이란 생각도 자연히 사라지게 되었으며, 천상계 → 완전 → 원(○)이란 일련의 관념은 근거를 잃게 되었다.

한편 우리의 감성에는 원은 아무런 결점이 없는 완전함, 복잡성이 없는 단순함, 어느 한 쪽으로도 찌그러지지 않은 완벽한 균형, 텅 빈 공(空)성 등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원은 완전한 모습의 상징처럼 보이는 반면 다른 모습들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천상계와 지상계의 구별은 성립하지 않지만 '완전한 모습 → 원이란' 생각을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다.

원이 완전한 모습이라면 원이 아닌 다른 모습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논리적으로 너무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논리적 추론은 빈틈이 없는 것 같지만 실상과는 거리가 멀 수 있다. 이 경우도 그런 예 중 하나이다. 왜냐하면 원이 아닌 다른 모습들이 사실은 원의 나툼(구현, representation)이기 때문이다. 근본인 원은 하나지만 그것이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투어질 때는 수많은 형태로 드러난다. 그 본성은 원인데, 그것이 여러 다른 모양으로 나투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모든 다양한 모습들은 있는 그대로 모두 완전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다.

▷ 일상적 추론 : 원은 완전한 모습이다 : 원이 아닌 것은 불완전한 모습이다.

▷ 현대과학적 해석 : 원은 완전한 모습이다 : 원이 아닌 것들은 원의 나툼이다. 그러므로 원이 아닌 것도 원과 같이 완전한 모습이다. 세상이 다양한 것은 원이 나투어지는 양상이 여러가지 이며, 이들이 결합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이 글의 핵심이며, 이는 현대수학과 현대물리학의 중요한 이론인 군이론 (group theory)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제부터 약간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설명해보겠다.

▲ [그림 1]대상으로서 원은 본성으로서 원의 '자체나툼'이다

[그림1]로 표현해 보면 원은 평면에서 각도 θ로 돌려도 어디나 꼭 같은 일정한 값을 갖는다. 이것이 원의 속성인데, 이것을 대상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 우리가 보는 원의 모습이며, 이를 원 그 자체의 나툼이라 하여 '자체 나툼(trivial representation)'이라고 한다.

그런데, 다음 [그림2]와 같은 떡잎 모습이 원의 '첫번째 나툼'이란 것은 수학을 배우기 전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이것은 그렇다고 받아들이기로 하자.
▲ [그림 2]대상으로서 이 두 떡잎 모양은 원의 '첫번째 나툼'이다.
'두번째 나툼'은 [그림3]과 같이 4개의 떡잎 모양이 된다. 이와 같이 계속해서 '세번째 나툼', '네번째 나툼'으로 올라갈수록 복잡한 모양을 이룬다.
▲ [그림3]대상으로서 이 네잎 모양은 원의 '두번째 나툼'이다

원운동은 이렇게 무한히 많은 나툼이 가능하며, 이들 각각은 원의 나투어진 모습이다. 번호가 클수록 복잡한 모습이 된다. 위의 세 가지 나툼이 결합된 모습의 한 예를 그려보면 아래[그림4]와 같다.
▲ [그림4]세개의 나툼을 적절히 모으면 이런 복잡한 모양이 된다. 모든 모양이 다 원의 나툼이다. '원성'을 떠난 모양은 아무것도 없다. '원성'을 다양하게 나투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모두가 있는 그대로 완전한 모습이다.

이와 같이 원의 나툼을 결합하면 다양한 모습이 된다. 이로써 평면상의 모든 모습이 사실은 원의 나툼 외에 따로 없는 것이며, 그 어느 모습도 원성(圓怯)을 떠난 것이 아니다.
▲ [그림5]구면은 3D 원의 무분별성을 나타내는 텅빈 모습이다. 이 세상의 다양한 모습은 이 구면의 나툼이다. '불상(부처님의 생각을 비운 모습)'이나 '생각하는 사람(중생의 고뇌하는 모습)'도 다 같이 모습 없는 3D '원성'을 나투고 있다.

요즘은 '아바타' 영화 덕분에 3D (3차원) 입체화면이 일상사가 되었다. 이 세상 물체들은 3D이기 때문에 원의 나툼이 아니라 구면의 나툼이다. 이 경우 완벽한 모습의 원형은 구면이고, 그것의 나툼은 실제 물체들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의 모습은 다같이 구면이 나투어진 것이며, 따라서 있는 그대로 완벽한 모습이다.

군이론 (group theory)을 모르면서 이상의 얘기를 온전히 알아듣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 세상의 다양한 모습이 원 또는 구면의 나툼이란 점을 일단 받아들이기로 하고 그 의미를 음미해보기로 하자.

우리는 눈으로 사물을 보는 관찰자이다. 우리 관찰자의 입장에서 보면 어느 특정 방향을 절대 기준으로 잡아야 할 이유가 없다. 모든 방향이 원과 같이 동등하며 분별이 없다. 내가 원과 같은 무분별성으로 세상을 볼 때 이 세상의 물체들 즉 대상은 어떤 모습이 가능할까? 이를 과학에서는 회전의 대칭성과 나툼의 문제라고 한다. 철학적 표현을 한다면 '관찰자의 무분별성 원리'라 할 수 있겠으며, 이것이 실제 관찰대상에는 어떻게 구현(나툼)되는가를 알아보는 문제이다. 이 문제의 답이 바로 첫 번째 나툼, 두번째 나툼, 세번째 나툼… 등으로 수많은 나툼이 된다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차별이 나타난 모습'이다. 그러므로 분별이 없는 자리인 관찰자의 본성에서 분별이 있는 사물들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분별이 없는 자리에서 분별이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대과학의 실례가 원의 군이론이다.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에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에 분별이 나타난다"라는 일원상의 진리를 보여주는 과학적 증례로 볼 수도 있겠다. 세계의 다양한 모습(相·상)이 실은 완벽한 원 '겁(怯)'의 나툼이다. 이러한 비유적 설명은 아무 잡념이 없는 열반과 번뇌가 왜 하나인가 '불이(不二)'란 말씀에도 적용될 수 있겠다. 또는 중생이 곧 부처란 말씀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편이 될 수도 있겠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무분별의 진리가 나투어지는 다양한 모습에서 같다고 볼 수 있다. 다음과 같은 비교가 가능하겠다.
▲ '생각하는 사람'(중생의 고뇌하는 모습)
▷ 법신의 완전성(性) : 주관의 무분별성(원), 열반의 안정과 고요함, 부처의 텅 빈 마음

▷ 나투어진 상(相) : 대상의 다양한 모습, 번뇌의 불안과 요란함, 중생의 꽉찬 아상

이런 면에서 볼 때 이 사바세계가 다름 아닌 불국토의 나투어진 모습이며, 중생의 번뇌가 부처님의 열반을 떠난 것이 아니다. 법신불의 진리가 우주 자연과 우리의 삶에 그대로 나투어지고 있다. 일원상을 보면서 우리 자신이 곧 법신불의 나툼임을 생각해본다.
▲ 소광섭 /
    서울대학교 물리천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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