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를 담은 빛, 청사초롱

오늘날 거리의 가로등에 청사초롱이 걸리면 전통축제나 중요한 행사가 열린다는 뜻으로 보인다. 큰 행사가 열릴 때 거리에 청사초롱을 거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청사초롱 하면 흔히 전통혼례식을 떠올리게 된다.
"청사초롱 불 밝혀라. 잊었던 낭군이 다시 돌아온다." 유명한 경기민요 태평가의 한 구절인데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가 청사초롱 등불을 준비하고, 신부가 살던 친정집을 떠나 신랑집으로 시집가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한다.

청사초롱은 길을 밝히거나 혼인할 때 쓰였지만, 손님을 맞이하고 안내할 때 주로 사용했다. 물론 옛 조상들의 이야기인데, 오늘날 밤의 어둠을 몰아낸 전기가 탄생하기 이전 초를 사용하던 때의 이야기이니, 지금으로 보면 손전등이나 외등의 역할과 같다 하겠다. 그러나 혼례 때의 청사초롱이 실제적인 등 이상의 상징적인 이미지로 작용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초롱이 주는 미적 모양새와 전통적인 느낌이 선사하는 향수 때문일지도 모른다.

문화관광부에서는 2001년을 한국방문의 해로 지정하면서 '외국손님을 기쁜 마음으로 친절하게 모신다'는 의미를 살려 청사초롱을 캐릭터화하여 마스코트로 지정하기도 했다. 초롱은 촛불이 바람에 꺼지지 않도록 외피를 씌운 옥외용 제등으로서 지초롱, 사초롱, 조족등, 북등이 있으며, 크기는 15~50cm 정도이고, 재료는 동사, 철사, 대오리, 나무, 수수깡 등을 썼다. 내부 바닥 중심에는 초꽂이를 부착하였고, 표면은 백지나 유지 또는 깁(紗)을 발랐으며, 유리가 수입된 뒤로는 유리를 끼우기도 했다. 지초롱은 나무와 대로 골조를 하여 만든 초롱이고, 사초롱은 일반 초롱보다 훨씬 큰 초롱으로 타원의 농(籠)형태인데 납작한 철이나 놋쇠 또는 대오리를 사용했다.

청사초롱은 청사에 홍사로 상·하단을 두른, 조선 후기에 왕세손이 사용했던 초롱, 또는 일반인이 혼례식에 사용했던 홍사 바탕에 청사로 단을 두른 초롱을 말한다. 일반인들이 혼례식에 청사초롱을 사용했으므로 청사초롱은 곧 혼례식을 의미하는 뜻으로 통용되기도 했다.

고려시대의 궁중에서는 연회 때 강사초롱(絳紗燭籠)을 사용했으나 조선시대 초·중기에는 절약을 위하여 초의 사용을 제한해 사초롱이 많이 쓰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1746년(영조 22년)에 편찬된 〈속대전〉에 따르면 왕의 거동 때 사초롱을 맨 등롱군의 수와 등롱의 색을 정했다고 했으나 그것을 시행한 것은 1804년(순조 4년)이었다.

혼례식에 청사초롱이 쓰인 것은 조선후기부터인데, 홍·청의 비단은 조화를 뜻하는 것으로 부부의 금실을 상징하고, 홍색은 양(陽), 청색은 음(陰)을 상징한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우주만물이 음양의 조화로 이루어졌다고 믿어 혼례식에 사용하는 초롱도 이러한 음양을 나타내는 청홍의 배색을 했던 것이다. 거기에 우주만물의 시작인 음양화합을 기원하는 뜻이 담겨 있으며, 청사초롱에 불을 밝힘으로써 신랑각시의 화합과 조화로운 새 출발을 기원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청사초롱은 신랑이 말을 타고 신부집으로 떠날 때와 신부가 가마를 타고 시집올 때 길을 비추어주는 것이었는데, 초롱 대신 횃불을 쓰기도 했다. 청사초롱은 예로부터 문학작품에 많이 등장한다. 최명희는 역작 〈혼불〉에 청사초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제 1권의 첫 소제목이 '청사초롱'이고 그 혼례 장면의 일부를 보면 다음과 같다.

하님과 대반은 술상 위에 놓여 있는 표주박 잔을 챙긴다.
세 번째 술잔은 표주박인 것이다. 원래 한 통이었던 것을 둘로 나눈, 작고 앙징스러운 표주박의 손잡이에는 명주실 타래가 묶여 길게 드리워져 있다. 신랑 쪽에는 푸른 실, 신부 쪽에는 붉은 실이다. 그것은 가다가, 서로 그 끝을 정교하게 풀로 이어 붙여서 마치 한 타래 같았다.

이제 이렇게 각기 다른 꼬타리의 실끝이 서로 만나 이어져 하나로 되었듯이, 두 사람도 한 몸을 이루었으니, 부디부디 한 평생 변치 말고 살라는 뜻이리라. -〈혼불〉 제1권-

전통 혼례의 절차가 매우 세세하게 묘사되는 가운데 표주박에 얽힌 청실·홍실은 남녀 조화의 상징성과 상생 조화의 의미를 복선으로 깔고 있는 한 장면이라 하겠다.

1967년 영화감독 임권택은 신영균, 남정임 주연의 영화 〈청사초롱〉을 만들었으며, 그 밖에 많은 시인들이 청사초롱에 관한 시를 남겼다.

오늘날에 있어서 청사초롱의 의미는 아름다운 전통문화를 상징하는 하나의 옛 물건으로서, 혹은 전통을 새기고 되돌아보며 느껴보는 하나의 공예품으로서 체험이나 공예품 만들기, 혹은 전통문화 작품 전시 등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실생활에서는 의미가 없어졌지만, 우리의 의식 속에는 위에 살펴본 것과 같은 의미와 상징성으로 길이 남아 있을 터이다.

각 지역이나 전통문화 전승센터 같은 곳에서는 전통혼례식 시연이 열리고, 전통혼례식을 거행하기도 한다. 전통문화에 관계하는 개인들이 전통혼례식을 운영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청사초롱의 의미를 느껴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많은 각 지역 전통축제 기간 동안에도 그 맥을 이으려는 노력들이 깃들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실생활에 있어서 쓰임새는 없어졌지만, 옛 물건으로서의 의미는 우리들 마음속에 곱게 살아있다. 청사초롱하면 불을 밝혀들고 아씨를 모시고 앞서가는 하인의 모습이 어른거리고, 해질녘 청사초롱을 앞세우고 함을 맨 함진애비가 조마조마하게 기다리는 신부집으로 씩씩하게 걸어가는 모습이 연상되는 것이 그런 의미인 듯하다.

청사초롱에 담긴 상생 조화의 의미와 미적 감각과 그 상징적 문화성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관심을 갖고 개발하고, 창조하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새로운 문화로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 여긴다.

▲ 한지선 /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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