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불교·학자불교·실행불교 다 갖춘 참 불법
우주만유의 본원 신앙, 공적영지의 광명 따라 일원 화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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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교에서 신앙하면 떠오르는 법문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 원불교 교도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법문이지요.

성질이 불순하고 불효가 막심한 자부(子婦)때문에 실상사 부처님께 불공하러가는 노부부에게 소태산대종사께서 내려주신 법문으로 '그 며느리가 바로 산 부처이니 며느리 부처님께 불공을 잘 하라'는 내용의 실지불공에 관한 법문입니다.(대종경 교의품 15장)

대종경 말씀 중에 저절로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지는 법문의 하나이며 연극으로도 공연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큰 교훈을 삼고 실천하고 있는 법문이기도 합니다.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만약 오늘날 어느 교도부부가 며느리 때문에 기도하러 교당에 왔다면 어떻게 지도를 해야 할까요? 교의품 15장 법문처럼 '그 며느리가 바로 산 부처이니 며느리 부처님께 불공을 잘 하라'고 지도해야 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모범 답은 되어도 정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오답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거 노부부처럼 진리기도가 충만한 시대에 진리기도가 전부인 사람들에게는 실지불공 법문이 적합한 큰 법문이 되겠지만, 진리기도가 불신시대이며 진리기도가 결핍된 중생들에게는 실지불공은 불공이 아니라 영악한 중생심을 키워주는 가벼운 처세에 그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진리기도를 장려하고 진리기도 운동을 하여 신앙심을 키워야 할 것 같습니다. 신앙심을 키우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물론 신앙의 방법이나 신앙의 대상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신앙심을 키우기도 하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신앙심이 없는데 신앙의 방법이나 신앙의 대상만 바꾼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저 또한 그렇고 세상 사람들 역시 그렇습니다.

대종사님께서 친제하신 〈정전(正典)〉의 은혜는 종교사적으로나 인류사적으로도 정말 큰 은혜입니다. 정전 말씀은 대오분상(大悟分上-크게 깨달음 입장)의 연역적 논술로서 깨닫지 못한 중생들에게 진리와 진리생활에 대하여 깨우침을 주기 위한 논술이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오분상이라는 경지에 대한 깊은 믿음에 바탕해서 내 생각이나 주견을 놓고 대 환희심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일원상의 신앙'장은 더욱 그렇습니다.

다만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자칫 해석에 치우쳐 신앙심과는 멀어지는 우를 범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일원상의 신앙은 한 마디로 말하면 일원상의 진리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 본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첫째 우주만유의 본원으로 믿는 것, 둘째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는 것, 셋째 대소유무의 모든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첫째 우주만유의 본원으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고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우주만유에는 본원이 있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우리 눈에 보이거나 우리가 인식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고 본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가> 4장 '법신불 찬송가'에서는 쉽게 이해하도록 '만유의 어머니'로 표현해 주셨습니다. 본원으로 믿는다는 의미는 더 깊고 더 많은 의미가 있겠지만 가장 기초적으로 우주만유에는 어머니가 계시고 그 어머니를 믿으라는 것입니다.

실지생활 속에서 우주만유의 본원으로 믿는다는 뜻을 해석한다면 일원상의 진리를 만유의 어머니로 모시고 진리불공의 대상을 삼으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주만유의 의미 속에는 제불제성도 일체중생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제불 제성의 심인으로 믿으며, 일체 중생의 본성으로 믿으며'라는 말씀도 똑같은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 입니다. 이와 같은 우주만유의 본원 즉 만유의 어머니는 기독교 조물주의 개념과도 소통하기도 합니다.

둘째는 대소유무에 분별이 없는 자리로 믿는다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거나 우리가 인식하는 대(大)자리를 비롯하여 소(小)자리와 유무(有無)자리라는 분별이 없는 일원상의 진리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일원상의 신앙은 온갖 사량과 일체의 분별이 없는 초월의 진리를 믿는 것으로 생멸 거래도 없고, 선악 업보도 없으며, 언어 명상이 돈공한 진리를 그대로 믿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신앙은 사량하고 분별함을 다 내려놓는 신앙이어야 합니다. 사량하고 분별하는 것은 이미 믿음도 아니요, 신앙도 아닐 것입니다.

셋째는 대소유무의 모든 분별이 나타나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나타난 일체의 현상을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나타난 일원상 진리의 화현(化現)으로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일체의 나타난 분별과 선악업보의 차별 등을 단순한 자연 현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진리의 화현으로 믿고서 모두를 부처로 보아 신앙의 대상을 삼고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신앙생활을 하자는 뜻입니다.

또한 공적영지의 광명을 따라 대소유무의 분별이 나타나는 것 모두를 은혜로 보는 사은신앙의 뜻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선악업보에 차별이 생겨나고, 장중에 한 구슬같이 드러난다는 말씀을 통해서는 호리도 틀림없는 인과보응 신앙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를 간단히 두 가지로 좁혀 보면, 우주만유와 본원자리, 또는 분별없는 자리와 분별이 나타난 자리입니다. 우주만유는 분별이 나타난 자리요, 본원자리는 분별이 없는 자리입니다.

우주만유는 묘유로서 실지불공 신앙을 나타내며, 본원자리는 진공으로써 진리불공 신앙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일원상의 신앙은 일원상의 진리가 우주 만유를 통하여 무시광겁에 은현 자재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일원상의 신앙은 오! 은현 자재하시는 임이시여! 오! 자재하시는 임이시여! 라고 외치는 것입니다. 정산종사님께서는 법훈편 13장에 "신앙불교, 학자불교, 실행불교를 다 갖춘 불법이 참 불법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의 부족한 나의 공부가 신앙심을 작게 하는 죄업이 안 되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심을 키우는 원불교인, 신앙심이 넘쳐나는 원불교인, 그 장한 신앙심으로 교법에 맞는 대상과 방법을 찾아 더욱 은혜롭고 행복한 신앙생활이 되기를 염원해 봅니다.

▲ 이종화 교무
    부산교구ㆍ부산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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