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무늬의 해석과 적용

▲ 백자철화포도문호, 조선시대, 이화여대박물관

소멸된 의미 기호로서의 무늬
마치 '쌀'을 한자어로 미곡(米穀)이라고 기록한 것처럼, 조선시대에는 무늬를 문(紋) 또는 문(文)으로 표기하였다. 이러한 표기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일은, 당시의 무늬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장식 그 자체가 아니라, 언어적 해석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십장생무늬는 장수를, 석쇠무늬는 벽사(?邪,귀신막기)를, 박쥐무늬는 복(福)을, 포도무늬는 다산(多産)을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무늬를 이러한 '의미 기호'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이제는 뜻 모를 무늬들이 단순히 꾸며지기 위해 사용되고 있을 뿐이다.

무늬의 상처와 주검
오늘날 우리는 우리 무늬를 현대적으로 활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전승의 무늬에 적지 않은 상처를 주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기물의 표면으로부터 무늬를 떼어낼 때의 무성의함이다. 도자기 표면, 기와나 벽돌, 각종 복식의 표면, 그밖에 이러저러한 매체로부터 떼어내어 그것들을 종이 위에 옮긴다. 물론 무늬를 생활공간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그것들이 어느 정도 박리되고 분절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모름지기 모든 유기체나 문화적 산물들은 그 맥락을 잃어버리면 그로부터 더 이상의 생명력은 기대할 수 없게 된다. 들뢰즈의 말처럼 부분은 전체(맥락)로부터 분리되는 순간 그것들은 원래의 속성을 잃어버린다.

모든 무늬들은 그것이 시문(施紋)된 기물들과 더불어 원래의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쓸모를 위한다는 이유로, 원래의 몸체로부터 그것들을 떼내는 순간 그 무늬는 많은 상처를 입게 되고 주검의 파편이 되어버린다. 훌륭한 생명공학자나 의사들은 장기를 적출해낼 때, 기증자의 생물학적인 특성, 적출 시점들에 대한 섬세한 기록과 함께 냉동보관한다. 그렇게 해야만 다음 단계에서 성공적인 이식이 담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생명을 다루는 의사들처럼, 무늬를 다루는 디자이너들도 그것들이 원래 지니고 있었던 문화적인 맥락과 특성을 기억하고 그것이 어떤 상태로 적용되거나 활용되는 것이 좋을지, 깊은 연구와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무늬 너머에 있는 것들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들은 스크린에 비치는 영상을 본다. 그러나 그의 시선이 비록 스크린에 꽂혀 있다할지라도 감상자의 의식은 그 너머에 있는 작가의식에 닿아 있게 된다. 이것이 문화적 산물에 대한 일반적인 체용(體用)의 문제이다. '노동의 과정이 끝났을 때 나오는 결과는 노동의 과정이 시작되었을 때 이미 노동자의 생각 속에 관념적으로 존재한다'라고 말한 마르크스의 주장은, 어떤 문화적 산물도 객관적인 산물 그 자체로만 남을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일깨워준다.

무늬에 대해서도 똑 같은 체용의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무늬를 비록, 문(紋)이 아닌 순수한 장식적인 목적으로만 사용하고자 의도했다 할지라도, 그 공간을 어떻게 꾸미고자 하는가에 대한 시문자의 생각이 무늬 그 자체보다 우선했다면, 그렇게 사용된 무늬 너머에서 우리들은 그러한 생각의 소유자가 지니고 있는 의식과 만날 수 있게 될 것이다. 스크린에만 주목하는 사람들은 무늬의 장식적인 측면만 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스크린 너머를 보는 사람들은 제작자의 의식과 만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생각에 동의할 수 있다면, 우리 무늬를 단순한 장식을 위한 시각소재로만 취급하는 일은, 우리 스스로를 문화의 이방인으로 규정하는 잘못을 저지르는 일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무늬의 현대적 해석과 적용
우리 무늬의 현대적 해석과 적용이라는 측면에서 그것들은 매번 우리들을 매우 곤혹스러운 심리상태에 빠지게 한다. 만일 있는 그대로를 사용하게 된다면 '과거로부터의 차용' 외에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는 셈이 될 것이다. 반대로 전래의 무늬에 우리의 감각을 덧보탠 작업을 한다면 그에 대한 전통성과 정체성을 누구로부터 담보받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와 만나게 된다. 이같이 문제의 본질을 정리하고 보면, 무늬의 우리 시대에의 적용의 문제는 단숨에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중요한 점은 고유한 음식의 맛을 내는 우리만의 독특한 요리법을 아는 일이다. 야채, 생선, 육류 등의 식재가 동서양의 요리의 특성과 차이를 가르는 일은 드물다. 식재가 동일하다 할지라도 서양의 요리와는 다른 우리만의 독특한 맛을 내는 전래의 요리법을 우리는 가지고 있다. 그것이 바로 한식이다. 여기에 견주어 말한다면, 이 시점에서 무늬의 현대적 해석과 적용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상정할 수 있는 이상상(理想像)은 우리의 조상들이 가지고 있었던 우주론적 자연관이라는 요리법에 대한 훌륭한 전승자가 되는 길이다.

우주론적 자연관이란 모든 현상을 자연의 섭리로 해석하고 자연의 원리에 따르려는 사유이다. 그러므로 분수보다는 폭포를, 인위적으로 다듬어진 정원수보다는 자연수를 더 사랑하며, 자나 컴퍼스로 정리된 도형보다는 다소 불규칙하더라도 손의 떨림을 용서하려고 한다.

남겨진 과제
전래 무늬를 우리들이 오늘 다시 해석하거나 활용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단순히 우리 것에 대한 애착에서 오는 쇼비니즘의 발동인가, 아니면 그것이 가지고 있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어떤 매력 때문인가. 아니면 과거의 어느 시점을 기점으로 하여 문화적 단절기가 있었다고 보고 이를 메워보려는 시대적 계시에 대한 응답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피해갈 수 없는,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몫이다.

우리 무늬를 오늘날 어떤 공간이나 대상에 활용하더라도 한국적 사유의 기반이랄 수 있는 자연관이라는 형이상학적 패러다임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우리 자신을 전통의 흐름 속에 위치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소는 어눌하고 치졸해 보이며 정확한 치수가 계산되지 아니한 듯하며, 선의 굵기가 일정하지 않고 갈필(渴筆) 효과가 있는 휴먼터치의 우리 무늬는, 그러한 까닭으로 낡은 것이며 옛 것이라 해서는 안 된다.

해체주의 이후 서양미술의 흐름은 오히려 우리의 자연관의 성과물에 가까이 다가오고 있지 아니한가.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은 우리의 전래 무늬를 우리의 방식이 아니라 전혀 다른 조리법을 참고하여 서양식의 요리를 만들어내고도 그 오염 정도를 깨닫지 못하거나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일이다.

▲ 오근재 전 홍익대학교 / 조형대학장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