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의 구도열정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다

▲ 1960년대 후반 선진포 나룻터 주막.

선진포 입정터는 소태산대종사의 십상 중 '강변입정상'을 나타낸 장소이며, 원불교 성적지 4호로 지정되어 있다.

선진포와 관련 깊은 법성은 마라난타 존자가 백제에 최초로 불교를 전파한 것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영광군에서 대대적인 개발을 하여 백제 최초 불교 도래지를 관광단지로 조성했다.

구전에 의하면 길용리에 있는 옥녀봉은 '옥녀가 길게 머리를 늘어뜨리고 법성을 향하여 법을 전하는 성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한다. 법성에서 서쪽으로는 황해의 너른 칠산 앞바다가 너울거리고 조기 파시와 풍부한 해산 자원으로 법성항은 늘 분주했었다고 한다. 동으로 향하는 물줄기가 있는데 이 줄기가 바로 와탄천이다. 이 와탄천의 물줄기는 칠산 앞바다에서 시원하여 큰 소드랑섬과 작은 소드랑섬을 경유하여 길용으로 흘러드는데 산 태극과 물 태극으로 이루어진 물골 산골을 따라 선진포에 이르게 된다.

소태산대종사와 구인선진이 정관평 방언 공사를 하던 시기에는 강변주막터까지 배가 드나들었다고 하는데, 물줄기가 곁가지로 강변주막터까지 흘러 들어왔다.

소태산대종사의 강변 입정 시기는 대략 대종사 20세 초반의 일이다. 이 무렵 대종사는 아버지 박성삼의 열반으로 인하여 기울어진 가산을 탈이 파시를 통해 부채를 탕감한 시점이었다. 소태산대종사는 이전까지 삼밭재에서는 산신령에게 도를 구하고 이인 달사를 만나 도를 이루려는 등, 외부 환경에 있는 스승을 찾아 다녔다. 특이할 만한 점은 입정에 들던 시기 이전에 소태산 대종사는 불교와 기독교 등 다른 이웃종교와의 조우가 있었다.

▲ 원기28년(1943) 선진포 입정터.
원기15년 전음광 선진에 의해 기록된 법설에서 '독실한 신념은 인생의 행복이다'라는 제목에서 다음과 같이 그 상황을 밝히고 있다.

전략 …또 그 어느 때에는 예배당을 왕방(往訪)한 결과 모든 사람이 '하늘 아버지, 하늘 아버지'하며 복을 주십사 병을 나수워 주십사 하고, 혹은 야소가 천(天)의 독생자로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代)하야 십자가상에 정사(釘死)하였다 하며 인간의 부귀빈천과 수명 복락을 다 하늘이 자유 천단한다고 주창한다. 그 소리를 들은 나도 평소에는 심상(尋常)하든 창창한 하늘에 과연 무엇이 들어있는 것 같이 생각이 되었다. 그리하여 부처는 이미 허망한 것이어니와 혹 하늘에는 어떠한 영험이 있는가 하는 희망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알지 못하면 또한 믿기가 어려움으로 하늘을 또 한 번 시험하기로 내정하였다. 집에 돌아와 긴 막대로 하늘을 겨누며 치며 이 하늘아 영험이 있느냐? 없느냐? 영험이 있다면 있는 표정을 하고 없으면 가만히 있거라 하였다. 그러나 나의 내심은 저 하늘이 만일 영험이 있어 죄를 주면 어찌 하랴는 무서운 생각이 또 난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종시 벌은 내리지 않는다. 혹 하늘이 듣지 않았는가? 의심하여 재차 대성질호(大聲叱號)로써 무수히 욕하였다. 그러나 이내 별 일은 없고 말았다.

이 시험이 있은 후 부터는 하늘도 부처와 같이 허망한 것이며 그것을 믿는 사람도 따라서 허망한 사람이라 단정하는 동시에 이것이나 저것이나 사람으로서 믿지 못할 것이라고 자인(自認)하였노라.

이와 같이 절집의 불상과 기독교의 야소를 시험해 본 결과 허망하다는 것을 확인한 소태산대종사는 본격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관심을 돌리게 되며 내면적 세계에서 도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소태산대종사는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가산을 돌보지 못한 상황에 처했고, 또 한편으로는 진리를 향한 구도열정에 목 마르던 시기였으니 당시의 심경이 어찌 편할리가 있었을까? 당시 심경은 바로 적막강산의 심경이었을 것이다.

이때 소태산대종사의 심경을 〈대종경 선외록〉에 실린 탄식가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탄식가'는 소태산대종사가 도를 이루지 못해 탄식하고 또한 대각을 하였으나 말할 곳이 없어 탄식한 내용을 담은 가사이다.

어찌하여 생사고락 그 이치며
우주만물 그 이치를 알아볼까.
이러구려 발원하여
이산으로 가도 통곡
저산으로 가도 통곡
사방두루 복배하고 산신을 만나볼까
도인을 만나볼까
이인을 만나볼까 이리저리 하여보니
조실부모 이내 몸이 사방에 우접없이
일편단신되었으니 의식도리 전혀 없어
일일삼시 먹는것이 구설음해 욕이로다.


입정 상태에 접어든 소태산대종사는 어느날 마을 주민들과 함께 법성장을 보러 가기 위해 선진포에 이르게 된다. 나룻배를 타고 마을 주민들은 법성으로 장을 보러 가 버렸고 입정 상태에 든 소태산대종사는 바다를 바라보면서 입정상태에 든 모습으로 서 있었고 반나절이 지나 법성장에서 돌아온 마을주민에 의해 발견되었다.
지금의 선진포는 새로 개설된 도로와 하천 정비에 의해 흔적이 사라지고 당시 소태산대종사가 입정에 들었던 아름드리 팽나무 아래 '강변입정상'을 표시한 비석이 서 있다.

이 글씨는 고산(李雲捲)종사의 유묵이며, 비석 후면에는 '대종사 구도시절 이곳 나룻터에서 깊은 정(定)에 드시다. 원기 71년 7월 27일. 고산법사 쓰시고 전국대학생연합회 세우다' 라고 적혀 있다.

혼란했던 질풍의 시대. 국가와 개인 가정 등 모든 상황이 어려웠을 무렵, 도를 향한 구도 열정만이 활활 타 올랐을 청년 대종사. 입정터에는 표지 비석이 시간과 공간을 뛰어 넘어 한결같은 입정에 들어있다.

< 영산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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