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원상서원문, 일원의 위력 얻고 체성 합해
개인·사회적 진보는 물량적 발전 아니다
매일 수시 독송하여 지금 여기서 이루자

▲ 강해윤 교무/서울교구 은혜의집교당
소년원에 보호된 청소년들과 교도소의 수용자를 대상으로 하는 교정교화를 하다보니 힘겨운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 이들에게 언제나 묻게 되는 질문이 있습니다.

"여러분의 희망은 무엇입니까?"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대부분의 대답은 "이곳에서 빨리 나가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나가서는요?"하고 질문을 이어가면 잠깐씩 생각하면서 대답을 하게 되는데 최종 종착지가 "돈을 많이 벌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때가서 생각해 보겠습니다"로 마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런 경우가 아니라도 우리는 누구나 한가지씩 꼭 이루고 싶은 희망을 갖고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희망, 또는 원을 이루기 위해 매일 매일 열심히 노력하고 그 희망을 성취하는 기쁨을 누리고 있는 사람도 있을 테지만, 저 멀리 희망을 바라만 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스스로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본성을 회복하면 곧 바로 부처임을 가르쳐 주시고, 그것을 인생의 가장 큰 희망으로 삼도록 하여 주셨으니 이것이 우리의 가장 큰 서원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큰 서원을 이루기 위한 우리 모두의 발원문이 바로 일원상 서원문입니다.

일원상 서원문은 먼저 궁극적 진리인 일원의 모습을 전제하고 그 일원의 진리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두 가지 세계를 설명 한 뒤 우리 어리석은 중생들이 심신작용을 통해서 진급을 하여 그 본원에 합일하고 그 위력을 얻도록 하는 신비로운 발원문입니다.

어린 시절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처음으로 우주를 생각합니다.

신비하게 펼쳐진 은하수와 별자리를 보면서'나는 어느 별에서 와 지금 여기 있는가?'하며 처음으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진리를 깨달아 가는 첫 걸음일 텐데 불행하게도 그 생각은 오래지 않아 일상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가끔 추억할 뿐입니다. 과학적으로 우주의 나이는 대략 137억년쯤 된다고 알려져 있고 최초의 큰 폭발(Big bang) 이후 계속해서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긴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우리의 3차원적인 인식체계로 이해하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시간과 공간도 변화하고 있으며, 그 변화의 바탕이 되고 있는 영원한 것이 있습니다. 이 두 가지는 진리의 다른 모습일 뿐이며 이것을 능히 유상하고 능히 무상하다고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일원의 진리를 실생활 속에서 또는 우리 자신들의 삶에서 어떻게 구현해 갈 것인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삶은 영원한 불생불멸의 진리를 바탕으로 해야 합니다.

저는 교도소에서 많은 수형자들을 상담하고 있는데 그들은 한결같이 죽으면 그만이라는 단생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교도소 안에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지금 즐겁게 살다가 힘겹거나 괴로워지면 죽어버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머릿 속 한켠에 담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살은 늘어가고 삶의 질은 낮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생각하든 안하든 영생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죽어서도 없어지지 않는 영혼이 있습니다. 어젯밤 잠을 자면서 당연히 내일 아침을 맞게 되리라 하면서도 오늘은 내일에 대해 모른다고 말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가?'하고 물으면 '어디선가 온 듯 하다'면서도 '어디로 갈 것인가?'하고 물으면'없어져 버릴 것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우리가 이런 어리석음을 극복하고 무한히 긴 시간과 무한히 큰 공간, 그것마저도 넘어선 영원불멸한 진리를 볼 수 있는 지혜의 눈을 뜨고 그 진리에 바탕한 삶을 살아야합니다.

우리의 삶은 변화를 수용하고 인과의 이치를 따라야 합니다.

일원의 진리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으로 무량세계를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변화의 원리는 마치 음양이 상승하는 것과 같은 인과의 이치를 따라 일어납니다.

인간을 포함한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심신작용을 통해 변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도 마찬가지로 일분일각도 그대로 존재하지 않고 변화하기 때문에 그 변화를 잘 수용하고 그 변화를 적절하게 진행하는 것이 삶 자체입니다.

뇌의 작용인 마음은 수시로 변하고 있고, 신체는 생로병사의 순환고리를 따라 잠시도 멈추어 있지 않습니다. 이러한 심신작용의 결과는 진급 또는 강급으로 나타나고 은혜가 생겨나거나 해독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인과의 이치를 따라 변화를 수용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생명의 젖줄인 우리의 강들이 파괴되는 현장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이 더 많이 누리고, 더 많이 먹고, 더 많이 사용하기 위해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게 자연을 파괴하는 현실입니다.

변화의 원리인 인과의 이치를 거스르고 자연의 순환 고리를 뚝 끊어 버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요? 그것은 해생어은(害生於恩)으로 생명을 키워내는 자연의 은혜 속에서 죽임과 재해의 해독이 생겨날 것이 너무나 자명합니다. 그래서 자연 속에서 인간은 더욱 더 고립되어 갈 것입니다.

개인적 삶에서의 진급과 사회적 진보는 물량적 발전이 아닙니다. 오히려 넘치는 것들을 덜어내고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간성이 살아 있는 은혜로운 삶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서원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 가야 합니다.

일원의 위력을 얻고 일원의 체성에 합하는 것을 훗날 순서를 따라서 이루어 질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자신 구원이 먼저이고 그 다음에 세상을 구제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는 매우 소극적인 종교인이 되고 말 것입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 말씀하신 광대무량한 낙원세계를 건설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뤄내야 할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현실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스스로 부처의 삶을 살아가면서 실현해 내야만 합니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잘 다스리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기에 일원상 서원문을 매일 수시로 독송하면서 '우리의 서원을 지금 여기에서' 이루어 가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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