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자력자에서 자력자로

▲ 성인이 됐음을 알리는 우리나라 전통방식의 관례식을 재현하는 모습.
5월은 가정의 달이라 불릴 만큼 어린이날, 어버이날 등 가족을 돌아볼만한 기념일들이 잔뜩 몰려있다.
그리고 그 중 성년의 날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주관하는 기념일로 매년 셋째 월요일 만 20세가 되는 사람들이 일정한 절차에 따라 성인식을 치른다.

나라별, 시대별 다양한 모습

이러한 성인식은 예로부터 각 나라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이어져 오고 있다. 미얀마의 경우 아이들이 12~13세가 되면 집 앞 공터에 화려한 집을 짓고 이 집에서 소년은 왕자 옷을, 소녀는 공주 옷을 입고 많은 악사들이 축가를 불러준다. 그리고 소년들은 성년식을 치르면 머리를 깎고 절에 들어가 약 2주간 머물며 아침마다 거리로 탁발 공양을 하는 짧은 승려 생활을 해야만 성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아프리카의 하마르족의 경우 성년식이 '소 등 뛰어넘기'인데, 발가벗은 몸으로 소 등을 네 번 뛰어오른다. 무사히 통과하면 축하를 받지만 만일 소 등에서 떨어지면 평생 놀림감이 되거나 여자들로 부터 채찍질을 받는다.

또 남태평양 펜타코스트라는 섬의 원주민들은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체력과 담력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발목에 포도넝쿨이나 칡뿌리 등을 감고 30m 정도 높이의 탑에서 뛰어내리게 했는데 원주민의 의식에 착안해 뉴질랜드에서 시작된 것이 현재의 번지점프라고 하니 흥미롭다. 그렇다면 우리의 성인식은 어떠할까?

관례라 불리는 성인식이 우리 땅에서 언제부터 행해졌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지만 삼국시대에 들어온 중국의 예교가 그 기원이라고 추측된다. 그러나 고려 시대에 이르러서는 광종 이래 왕자에게 원복의 예를 행하게 한 것이 시초가 돼 조선시대에도 유교관습을 받들던 상류지식계급에서 널리 행해졌다.

<문공가례>나 <사례편람>의 기록을 살펴보면 남자는 15세에서 20세 사이에 관례(冠禮)를 행한다고 나와 있다. <예(禮)>에도 '이십이관(二十而冠) 삼십이유실(三十而有室)'이라 하여 남자는 20세에 관례를 하게 했으나 조선 후기 조혼이 성행함에 따라 관례의 시기 역시 앞당겨 질 수밖에 없었다.

이 관례를 할 때에는 예정한 날짜보다 3일 전 주인이 사당에 고하고 계빈이라 해서 손님을 청하여 관례 전날 머물도록 한다. 그리고 삼가례라고 하는 가관건, 재가모자, 삼가복두의 세 절차를 거치게 된다. 조부나 아버지가 주인이 되며 주인의 친구 중에서 어질고 예법을 잘 아는 이를 손님으로 모신다.
관례를 집안의 중대사로 여겼던 사대부에서는 관례를 혼례보다 더 성대하게 치렀다고 한다.

이는 여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여자는 나이가 15세에 이르면 비록 혼인을 정하지 않았더라도 역시 계례라는 성인식을 치른다고 되어 있으나 일반적으로 혼약이 성립되었을 때에 계례가 행해진 것으로 보여진다. 관례에서 조부나 아버지가 주인이 되어 손님을 모셨다면 계레는 계자의 어머니가 주장이 되어 친척 중에서 어질고 예법을 아는 부인을 계빈으로 정해서 계례 전날에 모셔와 유숙케 하고 예를 행한다.

당일 날이 밝으면 별석 상 위에 관·계·배자 등의 복장과 주주·잔반 등을 준비해 놓고, 계빈이 오면 계자의 어머니가 맞아서 대청으로 올라가 비녀를 꽂아주는 것으로 식을 대신한다. 그런데 이러한 관례는 모든 지역에서 동일한 형태를 취하고 있지는 않다.

서울의 경우 보통 혼인을 정해놓고 하든지 혼인을 정하지 못한 경우는 조부모나 부모 중 우환 중일 경우 하루속히 성인으로서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관례를 치르기도 하였다. 보통 관례를 지내기 3∼4일 전에 사당에 주과포로 고하고 당일이 되면 조부나 부모의 친구 중 유복하고 덕망있는 학자를 모셔와서 주례로 삼는다. 주례자가 관자의 귀밑머리를 풀고서 머리를 끌어 올려서 북상투를 짜고 다음에 망건을 씌우고 그 위에 복건과 초립을 씌운다. 아래는 도포와 전복을 입히고 간단하게 축사를 한다. 그리고 이때 자(字)를 지어주게 된다. 그 후 성인으로서 사당에 가 경건히 고하고 나면 집안 사람들이 모여 성대하게 관례잔치를 벌인다.

이렇듯 서울지역의 관례가 복잡하게 진행된 것에 비한다면 경기도 화성 지역은 조촐한 편이다. 이 지역에서는 혼인을 정한 후 사주를 보내는 대로 관례를 치르는데 신랑이 굵은 상투를 매고 사당에 참배한 다음 부친의 친구 댁을 다니면서 인사를 하고 나서 관례잔치를 벌이는 정도로 간단하게 진행된다. 그리고 그 잔치의 규모 역시 막걸리 한 잔 정도와 메밀을 빻아서 체로 쳐 만든 국수를 대접하는 정도였다고 하니 화려한 서울의 관례와 비교된다.

강원지역 역시 관례는 혼인날을 앞두고 길일을 택일해서 행해진다. 당일이 되면 목욕 재계 후 친척 중 유복한 사람이 상투를 짜주고 망건을 씌운다. 만일에 관자가 어릴 경우는 초립을 씌우고, 과년일 경우는 감투에 갓을 씌우고 나서 도포로 갈아 입힌다. 그리고 죽은 조상에게 알린다고 하여 아침에 제사를 지낸다. 이 제사에서는 조상의 수대로 국수와 술잔을 준비해 고하고 그 후 친척 어른들에게 인사를 하고 국수를 들며 관례잔치를 한다. 다만 여자의 경우 머리는 잔칫날 아침에 수모가 귀밑머리를 풀어서 쪽을 쪄준다.

그러나 오랜 세월 성년의 첫 관문으로써의 역할을 해왔던 관례식이 근세에 와서는 맥이 끊겼는데 이는 갑오경장 때 단발령이 원인인 것으로 보여진다. 단발령으로 상투가 없어지게 되자 갓 대신 모자를 쓰게 됐고 또 조혼이 금지됨에 따라 관례는 혼례에 포함되어 행해졌기 때문이다. 설령 일부 계층에서 관례를 행한다 할지라도 혼례 전에 극히 간소하게 치렀다.

이렇듯 성인식은 각 나라별 시대별로 다양한 형태를 띠고 이어져왔다. 그리고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성년식을 행하는 이유는 아마 그동안 무자력자로 주위의 도움을 받아온 생활에서 벗어나 자력을 양성해 각자의 책임을 다하는 성인이 됨을 기념하는 데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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