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사 대각 향한 꿈, 바위에 영글다

▲ 귀영바위.
▲ 귀영바위 주막터를 원으로 표시했다.
▲ 귀영바위 주막터를 고증하고 있다.
영산성지 대각지에서 영산 성지고 정문을 지나 눈썹바위봉과 밤나무골봉으로 오르는 초입에 큰 느티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이 있다.

뒷편으로 1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사람이 들어갈 만한 조그마한 굴이 있는데 이 굴이 거북이 모양처럼 생겼다 하는 귀영바위다.
이곳은 소태산대종사가 병진년 대각 전에 입정에 들었다고 하는 귀영바위 터로서 원불교 교사에 알려졌다. 이 시기는 소태산대종사의 개인적 문제로는 아버지 박성삼공의 열반으로 인한 가산의 채무와 함께 집안 식솔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책임을 지게 되는 등,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던 시기였다.

이와 더불어 국가적으로는 일제 치하에 처하게 되는 등 너무나 어려운 시기였다.

아버지 박성삼공의 갑작스런 열반으로 인하여 집안을 이끌 책임을 맡게 되는 소태산대종사는 전일에 없던 경제의 경험은 일천하였고 집안을 운영해 본 경험이 없던 터였다.

근동에 일가 친척의 도움을 받을 길이 없고, 길용리 깊은 산중에서 누구의 도움을 받아 일가권속을 먹여 살려야 하는 중임을 갑작스럽게 맡게 되었으니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

10여 세부터 구도에 발심하여 삼밭재 산신령과 이인 달사를 통해 도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아들을 위해 곁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던 아버지의 부재는 소태산대종사 개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능력으로 아버지의 부채를 탕감해야 했고 또한 수행을 지속적으로 해야 할 숙명적인 입장이었다.

〈회보〉에 실린 원불교 창건사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대종사 20세 되시던 해 10월경에 부친상을 만나시니 당시 가정 상황을 거론하면 대종사께서는 원래부터 다른 원을 품었으므로 가정 산업에 대한 주의가 없으셨고, 모친 유씨와 부인 양씨는 여자의 몸인 고로 또한 가산의 내 외무를 통제하기가 어려운 동시에 부친의 유채(遺債)가 또한 정돈되지 못한 바 있으므로 그 유산은 점점 소모하기 시작하여 불과 수년에 거의 탕패(蕩敗)의 지경을 당하였다(백형과 아우는 출가하고 중형은 조사하였음으로 당시 가독 책임이 대종사에게 있었음)'.

대종사께서 당변하신 후로는 생활에 대한 의뢰와 구도에 대한 후원을 일조양실하게 되었고 겸하여 늙으신 모친과 어린 처자의 생활 책임도 또한 대종사에게 전담되었으니, 뜻 없는 살림과 경험 없는 고생에 그 신산(辛酸)함이 어떠하였으리요. 불시라 5개년 동안이나 구하고 바라던 도사도 수많은 사람을 접응하였으나 모두가 범상한 무리요, 허위와 사술에 지나지 못하며 정당한 진리를 찾을 곳이 없게 되었으니, 이것이 곧 대종사의 생활 곤란과 마음 고통을 아울러 받게 된 원인이다.

그리하여, 22세 되시던 해에는 종래에 도사 만나고자 하는 생각도 차차 단념하시고 심사미정(心事未定)으로 한 많은 세월을 보내시었다.

대종사 부친께서 대종사의 행동에 대하여 처음에는 혹 반대하셨으나 종후(終後)에는 정성에 감동한 바 되어 조금도 금지하지 않으셨고, 또는 장래에 범상한 인물이 아닌 줄을 예측하시고 모든 행사에 극력 후원하셨다.

열반 전년에도 대종사를 위하여 전일 기도 장소인 마당바위 부근에 수간의 공부실을 구축하였고, 열반 임시에는 철천의 유한이 오직 대종사의 전도 발전을 보지 못한 것이라고 누누히 말씀하셨다 한다.

이러한 처지에 있던 소태산대종사에게 길용리 이웃 마을에 살던 천기동 사람 이산 이순순은 탈이 파시에 장사 나가는 것을 권하여 상당한 돈을 벌게 하였고, 이 돈으로 채무의 상당 부분을 갚았다고 한다. 이러한 시절이 지나 다시 소태산대종사는 다시 구도일념에 사로잡힌다.

이때 근동사람 김성서라는 사람이 소태산대종사에게 백두개재로 넘어가는 길목에 귀영바위 앞 길가에 오두막을 얻어 주막을 차렸다고 한다. 이 주막은 당시 법성포항으로 향하는 길목으로서 강변 주막터나 선진포로 향하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길이었다.

귀영바위 집터는 당시 푹꺼진 땅으로 일명 '흙구덩이 집'이라고 하는 집터이다. 지금의 영산성지고 앞 쪽에 위치한 터라고 한다. 귀영바위는 이 터에서 멀리 있지 않다.
당시 동네에 살던 충산 정일지는 당시 귀영바위 집을 방문하니 그때의 상황은 이러했다고 한다.

"15세 전후부터 안면은 있었으나 전혀 교섭은 없었고 어느 땐가 귀영바위 계실 때 아랫목에 병중의 대종사를 방문한 일이 있었는데 얼굴은 누렇게 되어 보기 민망할 정도였으며 오는 사람에게 겨우 왔느냐고 인사할 뿐 전연 폐인으로 보였다."〈원광〉 41호 회상 일화)

이후 장사의 실패와 함께 지붕을 잇지 못한 탓으로 주막을 허물어지고 소태산대종사는 현재 대각 터로 이사를 하게 된다.
이후 소태산대종사는 영산을 방문할 때면 노루목과 귀영바위를 꼭 다녀갔다고 한다.

이 귀영바위 집터는 현재는 백산 정학현 선진의 후손인 영산교당 정상국 교도가 논으로 일구고 있다.
귀영바위 주막 터에 얽힌 소태산대종사의 삶의 노정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고 개인적으로 생각한다. 인간의 삶에서 큰 변화가 오고 환경이 바뀌었을 때가 또한 어렵다.

이때 소태산대종사의 구도 역정의 시기를 정산종사는 심사미정(心事未定)이라고 표현했다.

스승님의 한결같은 구도열정이 대각으로 향했듯이, 개개인의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난관들도 지극한 서원(誓願)으로 풀어가야겠다.

<영산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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