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광 교무·원광대학교(논설위원)
공의는 말 그대로 대중의 뜻을 의미한다. 어떤 사회에서든 공의는 존중되기를 기대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공의 수용자의 의무 못지 않게 공의를 결정한 사람의 책무성도 강조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양방향 책무성이 그것이다. 우리 교단 내 공의에 관한 법문이 많은 이유는 그것이 개인이나 단체에 그만큼 중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공중사를 단독히 처리하지 말며"(특신급 계문), "열 사람의 법을 응하여 제일 좋은 법으로 믿을 것이요"(솔성요론)를 비롯하여 초기교단 이래 시행해 오는 '공사' 문화도 다 공의를 중시하는 뜻으로 이해된다. 정산종사께서는 "공의란 곧 사회가 대체로 옳다고 여기는 바라, 모든 개인은 그 공법과 공론을 존중하며 그에 순응할 것이요"(정산종사 법어 제1부 세전), 이어서 "의논을 할 때는 자유로운 뜻을 말하되 공의를 거쳐 발령이 된 후에는 기꺼이 공의에 순응하는 것이 법다운 공가의 인물이니라"(법어 공도편19)라고 밝혀 주셨다.

그런데 공의가 공의답게 결정되고 대중이 그 결과를 존중하며 순응하기 위해서 먼저 공의 생산자에게도 절반의 책임을 묻는 이유는 공의 수용자인 대중의 의무만을 강요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대중의 뜻을 반영하는 통로는 다양하지만 흔히 대의제를 통하여 공의가 결정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렇게 해서 결정된 공의에 대해 '민심이 천심이다'라고 정당화하려는 목소리는 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공의 결정 과정은 절차상의 합리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다.

문제는 절차상의 합리성이 결과의 합리성을 충족시켜주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데 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올까 생각해보면 무엇보다 그런 공의 생산자 위임이나 선임의 몫이 구성원에게 귀착되어 결국 순환론에 빠질 공산이 크다. 그러므로 그 어떤 사회든 공의 결정은 그 사회 구성원의 민도와 비례한다는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여하튼 한번 결정된 공의가 잘 수용되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지만 공의 생산자의 책무성과 수용자 의무간의 비대칭구조를 반추해 볼 필요가 있다. 만일 공의 생산자들이 절차상의 합리성만을 전제로 이의 수용만을 강조하게 되면 그 권위의 실추는 물론 대중의 공의 존중과 수용, 공의 결과의 파급 효과도 기대하기 어렵게 된다.

그렇다면 이런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가? 한 가지 방안으로는 공의 생산자가 그 절반의 책임을 떠안는 길이다. 이는 먼저 공의 결정이 지자의 몫으로 남는 것을 전제로 한다. 교법에서 모든 차별제도를 불식하면서 오직 지자본위만을 인정하신 뜻도 이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 절차상 합리성의 최소 조건인 지자의 상대적 한계를 넘어서려면 적어도 공의 결정과정에 대한 투명성과 함께 책무성을 강조하는 방안을 제안해 본다. 만일 공의 결정에 참여한 지자가 그 결과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한다면 이는 극복의 대상이 될 뿐이다.

여기서 결과에 대한 책무성이란 적어도 의사결정 과정에 대한 투명성과 공의 생산에 대한 책임 수용을 뜻한다. 이렇게 공의 생산자에게 그 절반의 책무성을 강조하게 되면 그만큼 공의 결정에 앞서 결정해야 할 시비이해에 대한 분별의 절도와 밀도를 높이기 위해 공부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공의에 대한 책무성이 증발해 버려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그야말로 공의(空義)로 전락하거나 책임 떠넘기기식 요식행위로 또는 힘의 논리로 점철될 위험이 있다.

그러므로 공의가 공의답게 결정되고 대중이 그 결과를 존중하고 따르도록 하려면 양방향의 책무성, 절반의 책임 공유를 제기해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먼저 공의 생산자가 그 절반의 책무를 떠안아야 한다. 그러면 대중이 공의를 수용하게 될 뿐만 아니라 '분별을 내면 절도에 맞고 거두면 흔적 없는 마음공부'와도 줄 맞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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