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일원대종사' 열반표기(少太山一圓大宗師)

▲ 대종사 열반시에 대각전의 일원상기와 '불법연구회 창조 소태산일원대종사'열반표기.
만장(輓章)은 고인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글을 말한다. 이는 고인과의 영결에 임하여 북받치는 슬픔을 진정해 가며 쓴 글이다. 일명 만사(輓詞)·만시(輓詩)·영결시(永訣詩)라고도 한다.

만장의 유래와 뜻

만(輓)은 '앞에서 끈다'는 뜻으로 만장을 앞세워 장지로 떠난다는 의미가 담겨있다. 망인이 살았을 때의 공덕을 기려 좋은 곳으로 갈 것을 앞에서 인도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 선조들은 장사 때 만장의 수효를 가지고 고인의 덕망과 학식을 논하기도 하였으니, 초상이 나면 만장을 써서 보내는 것을 가장 큰 부의로 여겼고, 만장이 들어오는 것을 가장 큰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예가 사치스럽기보다 차라리 간소한 것'이라지만 돌아가신 이를 앞에 두고 그리워하는 마음 서글퍼하는 마음마저 간소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만장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중국의 춘추전국시대에 친지가 죽으면 상여의 뒤를 따라가며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는데 이를 만가(輓歌)라고 하였다. 옆에 따르던 사람이 그것을 기록한 것이 만장의 시초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충렬왕 16년(1290년) 성리학과 함께 들어온 주희(朱熹, 1130∼1200)의 '가례(家禮)'가 유입됨으로써 그 모습을 갖추었을 것으로 보인다.

만사의 규격은 일정치 않으며 대개 5언절구와 5언율시 또는 7언절구와 7언율시다. 때로는 고시체를 본떠서 장문시의 글을 짓거나 4자체로 쓴 경우도 있으며, 고인의 일대기 중에서 뽑은 행장 형식을 취하기도 한다.

문체와 내용

유교의 만장중에 '스승'에 대한 제목으로 지어진 것을 예로들면,

吾輩嗟無福 先生奄九泉 道與斯人去 言空百世傳
(저희들이 복이 없어서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이 세상의 올바른 도가 선생님과 함께 사라지는 것 같사오매,
이러한 사연을 백세에 전할 이가 누구일런지오.)

이처럼 글이 모이면 종이에 쓴 뒤 대나무 장대에 매달아 고인의 초상집에 비를 맞지 않게 세워둔다. 글을 쓴 사람이 직접 비단 등에 써서 가져오기도 한다.

학문이나 덕을 많이 쌓은 사람들의 초상 행렬에는 으레 수많은 만장이 뒤따르므로 그 숫자로 고인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기도 한다. 이름난 선비가 죽으면 각지에서 추도객들이 만장의 글을 써서 들고 와서 곡을 하며 상여 뒤를 따른다.

묘지에 도착하여 산역(山役:무덤을 만드는 일)을 끝내고 나면 만장을 태운다. 그러나 만장의 글들을 모두 모아 뒷날 문집이나 일대기를 담은 행장록을 만들 때 부록으로 싣기도 한다. 또는 사당을 만들 때 글들을 목판에 새겨 사당에 현판으로 걸어두기도 한다.

문체에 따라 만사와 만시로 구분된다. 길이 8자, 나비 2자 내외의 비단이나 종이에 적어서 깃발을 만들어 상여 뒤를 따르고 장례가 끝나면 빈청(殯廳)에 보관한다. 색상도 가지가지여서 백·청·홍·황 등 다양하게 사용된다.

만장의 위와 아래에는 적은 축대를 사용하고 대나무로 깃대를 만든다. 깃대의 머리에는 약간의 수식을 하고, 아래쪽의 공란에는 연꽃무늬를 그려 넣는다.

일반적인 내용은 첫 번째, 망인의 학덕, 이력, 선행, 문장, 직위 등에 대한 칭송한다. 두 번째, 망인과 자기와의 친분관계 등을 표시한다. 세 번째, 평소에 다정하게 지냈던 일이나 특별한 일을 떠올려서 두 사람의 관계를 밝히기도 한다. 네 번째, 또한 자기와의 관계가 없고 친면이 없으나 평소에 존경하거나 흠모하여 교제를 원하는 사이에도 그 뜻을 밝히는 만장을 지은다. 다섯 번째, 전혀 모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만 그 죽음 자체를 슬퍼하여 인생의 허무를 말하기도 한다.

불교도 스님의 열반시 만장이 애용되고 있다. 지난해 8월에 열린 범불교도대회에서 '대한민국 정부는 선교의 도구가 아니다' 등의 구호가 적힌 500여개의 만장은 시회현상과 연결시킨 특징을 보이고 있다.

소태산의 열반 만장

6월은 추모의 달이다. 원불교 교조인 소태산대종사의 열반시에 일원상기와 '불법연구회창조 소태산일원대종사'라는 열반표기인 만장을 걸었다. 일원상기와 열반표기는 백색모본단(白色毛本緞)으로 만들었다.

〈원불교 초기교단사 5〉를 통해 발인식 분위기를 살펴보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다.

'발인식 일시는 6월6일 오전10시에 거행하고 식후 1시에 장의 행렬이 출발하기로 결정되었다. 며칠동안 계속 내리던 비는 그치고 장의 행렬에 불편을 주지 않았다. 이날 장례식에는 8~9백명의 조객들이 모였다. 일경은 무슨 소요가 일어날까 대비하여 가급적 대중 운집을 금하였다. 행렬 가도에는 경찰들이 길목을 지켜서서 못들어오게 제지했다. 발인 행렬의 선두에는 일원기를 시작으로 열반표기, 소태산 진영을 실은 인력거가 뒤따랐으며 상기만도 698개나 되었고, 꽃 상여는 머리끈을 매고 각반을 친 55명의 젊은 제자들이 어깨에 매었다. 일경은 장의 행렬을 230명으로 제안했다. 이들은 모두 소태산이 친히 내린 법의를 입은 제자들이었다.'

장의행렬은 금강리 수도산 화장막으로 향했다. 소태산은 재세시 제자들에게 "금강산에 수도하러 간다"는 말을 자주했다. 대종사가 공식적으로 모든 제자들을 모아놓고 전법게송을 하고, 의발과 법복을 주고 같이 겸상을 하기도 하였건만 제자들은 누구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발인행렬은 '경호반-원상기-열반표기-사진-법사-영거(靈擧)-주상(主喪)-수위단원-친족-여회원·여회원-남회원·여회원-조객·조객-경호원' 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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