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가는 길이 얼마나 외로울까"

▲ 김복희 어르신은 '화천보은의 집이 내집이려니'하며 감사생활을 하고있다.
빨간 넝쿨장미와 싱싱한 나무들로 둘러싸인 화천보은의집. 해질녘 풀벌레들은 주거니 받거니 속삭이듯 울어댄다. 흡사 보은의집 어르신들의 마음을 노래하는 양~. 신선한 공기와 푸르른 자연이 함께하는 어르신들의 24시. 그래서일까. 자연 치유센터인 듯 어르신들의 건강이 호전된다고 한다.

15일 익산에서 새벽을 일깨워 화천보은의집으로 향했다. 너무도 평범한 어르신들의 노후 생활이 궁금했다.

그녀는 김복희? 혹은 엄성원?

2003년 9월 보은의집을 개원할 때 입소했다는 화천교당 김복희(법명 성원·84) 어르신. 그녀는 구멍가게를 하던 중 류마티스 관절염으로 더 이상 가게를 할 수가 없게 됐다. 심지어 보행이 어려워 유모차에 의지해야 걸을 수 있었다.

교당에서는 그녀를 '엄성원'이라 부른다. 하지만 보은의집에서는 '김복희'라 부른다. 왜 성씨가 달라진 것일까? 그녀는 한국전쟁에서 가족들을 온통 잃어 버렸다. 전쟁 통에 홀로된 그녀는 미성년자라 세대주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호적을 만들기 위해 부득이 새 아버지를 만나야만 했다. 인근의 딸 부잣집 80대인 김 씨 노인으로 아버지를 정하면서 그녀는 '엄 씨'가 아닌 '김 씨'가 된 것이다.

그녀는 가슴속에 꼭꼭 감춰두었던 성씨에 대한 비밀을 말한 후 "이생에는 김 씨로 살아 갈 운명이었어"하며 "나는 죽으면 바로 엄 씨가 될 것이제"라고 말했다.

죽을 준비 다 했지

그녀는 스스로 열반 준비를 다 해 놓았다고 귀뜸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열반 준비를 마친 것일까? 그녀는 "나 죽으면 교당에서 천도재를 지내 달라고 미리 재비를 맡겨 놓았어"하며 "교무님이 '엄성원' 이름만 불러줘도 나는 행복할 것 같다. 미리 갈 준비를 다 해서 편안하다"고 걱정이 없단다. 그녀는 "난 부모님 생각은 안 나고 교무님 생각만 난다"며 "여기에 날 데려다 준 그 교무님이 참으로 고맙고 감사하다"고 눈시울을 적신다.

그녀는 보은의집 친구들에게도 편안하게 사는 법에 대해 이야기를 하곤 한다. 하지만 친구들은 이해가 어려운듯 습관대로 하고 산다고.
어느 날엔 그녀에게 친구가 찾아와 살며시 물었다.

"당신 죽을 준비도 다 해 놓았다며."
"그 소리 어디서 들었어. 당신도 미리 해 놓아봐, 아주 편해."

그녀는 친구들이 그 일에 대해 물어 올 때면 "조금 건강할 때 죽을 준비를 해 놓아야지. 갑자기 죽으면 어떡하려구 그러우"하며 채근한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녀는 '지혜롭게 살아온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스친다.

그녀는 화천읍에서 노구에도 구멍가게를 하며 자력생활을 해 왔다. 또 틈틈이 생활비를 절약 해 목돈을 마련했다. 그녀는 "그 때 모아 둔 푼 돈이 내 천도재 비용이 됐다"고 말했다. 스스로 갈 길을 알고 챙기는 그 마음이야 오죽했을까.

그녀는 구멍가게를 하면서도 교당 천도재를 자주 참석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두 마음이었다. 하나는 '좋은 데로 편히 잘 가서 잘 오시오'하는 마음과 '홀로 가는 길이 얼마나 외로울까'하는 것이었다. 혼자 가는 그 길을 가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도 외로울 것 같더라는 것이다. 그녀가 외로움에 집착을 보이는 것은 아마도 '엄 씨' 가족들을 모두 잃어버렸기 때문이란 생각이다.

받아들이니 편안해져

요즘 그녀는 아픈 자신을 보니 사실은 '괴롭다'고 한다. 그렇지만 모든 것을 감사로 돌린다고. 그녀는 "이렇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것이다. 비록 관절염으로 손가락이 휘어지고 발이 밖으로 향하지만 '손가락 부처님 감사합니다. 발가락 부처님 감사합니다. 내 다리 부처님 감사합니다'는 기도를 쉬지 않는다.

그녀는 "아픔 몸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며 "살아있는 동안에는 소중한 육신이라서 돌봐줘야 한다"고 멍울 진 팔을 쓰다듬는다. 또 "80평생을 부려 먹고 살았으니 몸이 애쓴 것이다"며 "젊었을 때는 늙어서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한다. 이런 사실을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육신을 소중히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병이 그녀를 찾아 왔을 때 "어서 죽었으면 싶었다"며 "너무 고통스럽고 괴로웠다. 이렇게 아픈데 뭐하러 사나 싶을 정도로 많이 아팠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곳에 와서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얼굴이 편안해 졌다. 그녀는 "나는 처음 이곳에 들어올 때 '이 집이 내 집이려니' 하는 생각으로 왔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그녀는 입주할 때 마음이 편안했다. '내가 살 집이니' 편안해 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살찌는 비결, 감사생활

요즘 그녀는 살이 오른다고 한다. 처음 수술할 당시 담당의사는 "할머니, 뼈에 가죽만 씌워놓은 것 같아요"하며 측은해 했다. 장을 ⅓이나 들어내고, 고관절 수술도 했으니 약한 몸이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다. 그녀는 "이곳에서도 원망생활을 하는 사람은 살이 빠지고 더 아파, 하지만 감사생활과 규칙생활을 하니 살이 안 오르면 그것이 이상한 것이다"고 단체생활의 마음가짐을 공개했다. 그래서 친구들에게도 "자식에게 의지하는 마음을 다 놓아라. 지들도 자식 키우고 생활하려면 직장 다녀야 하는데 우리가 걸림돌이 되면 안된다"고 타이른다. 그렇게 소리도 없이 '좋은 마음으로 살아가자'고 친구들에게 기운을 보낸다.

그녀는 올해 7년째 보은의집에서 생활하면서 "싸워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혹시나 어르신들끼리 다툼의 소리가 나면 그녀는 돌아서 간다. 싸우는 모습을 안 보고 안 듣고 싶은 마음에서이다.

인터뷰 내내 그녀가 가장 많이 했던 말은 '편안하다, 감사하다, 힘들지 않다, 이곳이 참 좋다'는 말이다. 외출을 했다가도 보은의집 간판만 봐도 피로가 사라지면서 편안해 진다고 한다.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살게 해 주심에 법신불사은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 밤도 편안한 밤 되게 해 주세요.' 오늘도 간단한 기도를 마친 그녀가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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