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무사안녕 기원하며 올렸던 정화수
교단에서는 기도인의 맑고 깨끗한 마음 상징

고대 문명의 도시들을 살펴보면 한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물'이다.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을 끼고 발전했으며,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의 품안에서 성장했다. 황하문명 역시 황하라는 거대한 강을 기반으로 살고 있었다.

이렇듯 오랜 세월 물은 우리 인간과 떼려야 뗄 수 없는 대상이었다. 생명의 원천으로서의 물은 일정한 형태를 띠지 않는 비정형성과 더렵혀진 것을 씻어주는 정화력 등이 더해짐에 따라 민속신앙에서는 물을 신성시 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추앙하게까지 했다.

그래서 우리네 어머니들은 장독대에 물 한 그릇을 올려놓고 가족의 건강과 외지로 떠난 자식의 출세를 빌며 치성을 올리곤 했다.

머리와 눈을 맑게 해주는 정화수

또 〈동의보감〉 탕액편에는 약재를 채취하고 다루는 방법과 탕약을 달이는 법 등을 담고 있는데, 그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이 다름 아닌 물이다. 〈동의보감〉에는 한 사람의 건강과 수명에 물이 아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물을 성질에 따라 세분화 해 놓았는데 그 중에서 으뜸을 꼽으라면 바로 정화수를 꼽을 수 있다.

정화수는 정안수라고도 하며 이른 새벽 샘이나 우물에서 제일 먼저 길어 올린 물로 성질은 평(平)하고 맛은 달며(甘) 독은 없는데 하루의 새벽을 여는 천일진정이 이슬이 되어 수면에 맺혔기 때문이다.

정화수의 효용을 살펴보면 입에서 냄새가 나는 것을 없애고 안색을 좋아지게 하며, 눈에 생긴 군살과 막이 눈자위를 가리는 병을 없애 주고 술을 마신 뒤에 생긴 열리(설사)도 그치게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밖에 차를 넣어 달여서 마시거나 머리와 눈을 씻는 데도 좋다고 한다.

또 정화수에는 하늘의 정기가 몰려 있기 때문에 여기에 음의 기운을 보하는 약을 넣고 달여 오래 살게 하는 환을 만들었다고 한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일 이 물에 차를 넣고 달여서 마시고 머리와 눈을 깨끗하게 씻는데 아주 좋다고 한다.

부정을 물리치는 종교적 기능

세시풍속에서 정화수는 정성을 드릴 때 사용되는 공물의 대상이기도 하다. 경북 안동시 풍산읍에서는 음력 2월 초하루 영등일에 각 가정이 정화수를 올려 집안이 평안해지고 풍년이 들기를 기원한다. 충남 서산 창리에서는 동제 때 상당인 국수당의 제단에 정화수 세 그릇을 바치고 제를 지내기도 한다.

이밖에도 성주·조왕·삼신·용단지 등 가신을 위하는 집안고사에서도 정화수를 올리며 동제 때 정화수를 올린다.

이 때 정화수는 '정화수(井華水)'라고 쓰나, 발음에서는 불순하거나 더러운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의미의 단어인 '정화(淨化)'를 연상시킬 뿐만 아니라 의미상으로도 이를 상징하고 있다. 이러한 정화수는 정화력을 발휘하는 주술물 구실을 해왔는데 물 자체가 지닌 맑음이 부정을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정스러운 대상을 향하여 그릇에 담은 정화수를 손가락 끝으로 3번 흩뿌리는 것으로 정화의 주술을 베푼다.

이뿐 아니라 가정에서 가족을 위한 각종 고사나 축원을 할 때, 먼저 행하는 일 역시 목욕 재계와 정화수를 올리는 일이다. 목욕 재계가 물의 정화력을 빌려 신과 교응할 수 있는 자질 또는 심신 상태를 갖추고자 함이라면 정화수를 떠놓는 행위는 심신을 맑게 가지는 것을 근본으로 삼기 위해서다.

정화수를 담는 단지는 주로 오지로 된 소형 항아리가 많으며, 높이가 12~15cm 정도로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국민속논고〉와 〈한국민속문화론〉에 의하면, 정화수 그릇은 주로 중발이나 사발, 옹투가리를 사용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불단에 올리는 정화수, 청수

〈원불교 용어사전〉에 따르면 청수기는 법요도구의 하나로 기도나 여러 의식 행사 때에 맑은 물을 담는 그릇을 말하며, 교당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평소에도 불단의 청수기에 청수를 떠 놓는다.

본래 청수는 천도교 제례 의식에 깨끗한 물을 그릇에 떠다 모시는 것으로, 정화수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같은 물의 정화력과 청정, 생명력 등의 상징성이 믿음의 대상이 되면서 각종 종교에서 물 신앙을 수용하여 물법 신앙 또는 찬물 신앙이 형성된 것으로 보고 있다. 즉, 물의 치병력, 사악과 부정을 쫓는 힘, 천지 조화력, 재생력 등에 대한 신앙이 은연중에 내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초기 교단사를 살펴보면 기도를 올리는 데 있어 청수가 빠짐없이 등장함을 알 수 있다. 〈원불교 교사〉에는 '법인기도 당시 기도 장소인 각자의 위치에 단기인 팔괘기를 제작하여 주위에 세우고, 식을 시작할 때에는 먼저 향과 초, 청수를 진설하고, 다음은 헌배와 심고를 올린 다음 축문을 독송하였다'고 기록돼 있다.

백지혈인의 순간에도 소태산 대종사는 "음부공사는 이에 판결이 났다. 우리의 일은 이제 성공이다"며 바로 모든 행장을 차려 기도장소로 가도록하면서 일제히 시계와 단도와 기타 청수를 포함한 일체도구를 휴대하도록 했다.

이러한 사실만 보더라도 청수기는 이미 교단 초기부터 중요한 법요도구였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의 구도과정 등에서 나타난 청수의 모습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민속신앙 속 정화수와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불단에 청수를 올리는 뜻은 민속신앙 속 주술적 의미보다는 청수처럼 기도하는 사람의 마음도 맑고 깨끗하기를 바란다는 점에서 다르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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