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훈 교도·남산교당
    (논설위원)
일원은 유상하고 무상하다. 유상하다 함은 지금 보이는 것처럼 우주 지구상의 모든 것의 모습이다. 남아공의 현란한 축구에 열광하는 모습과 조용히 앉아 있는 나의 모습을 포함해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현상을 원불교는 유상(有常)이라 한다.

그러나 이 유상은 시간을 따라 변화한다. 우주와 만물과 사생은 결국 시간이 진행함에 따라 동적(動的)으로 변화한다. 그 동적 내용은 성주괴공과 생로병사와 진강급과 은해(恩害)이다. 이를 무상(無常)이라 한다. 이것은 일원상서원문의 내용이다.

유상이 무상으로 연결되는 속성은 시간이다. 즉 시간이 연결자이다. 우리는 현재의 모습에는 광분하지만 시간의 변화에는 무심한 경우가 많다. 유상 즉 현재의 모습인 슬픔이 있고 괴로움, 아쉬움, 억울함, 즐거움 등 수많은 감정으로 나타나는 심경의 현상에만 국한해서 보기 때문에 애가 탄다. 대부분 사람들은 어려운 경제여건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현재에서는 부자가 되었고, 시의원에 당선되어 천하가 자신의 것으로 보일 수 있다. 현재의 결과에만 국한하지 말자. 아름다움과 정직으로 심락(心樂)의 경지에서 도도히 살아가는 사람은 단지 이런 현재의 국한을 넘어 살기 때문일 것이다.

무상 즉 먼저 미래의 모습을 보자. 최근 지방자치단체 선거의 예를 보자. 4년 후, 시의원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렇게 긍정적으로만 예상되지 않는다. 벌써 싹수가 노랗게 보이기도 한다. 지금 당선 후의 모습이 바로 4년 후 선거의 결과를 미리 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선거 며칠이 지나지 않아 딴 소리를 하는 예비당선자가 나오기 시작하고 있다. 또한 영원한 부자는 없다. 시간의 연장에 서서 미래를 바라보면 참 많은 변화가 예상된다. 오히려 예상이 불가능할 정도로 급속히 변화할 것이다.

무상 즉 과거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이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 적공의 결과이지 않는가? 인과 없이 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 원불교 교도들은 잘 알고 있다. 과거의 올바른 선택이 현재의 결과이다. 건설산업을 천수답 산업으로 보는 것보다 건설산업은 산업 사이클이 큰 산업으로 보는 것이 훨씬 합리적일 것이다. 약 10년의 주기로 상승과 하락을 반복하고 있는 사실을 망각하고 무리한 투자로 많은 손실과 아픔을 낳고 있다.

문제는 이런 변화에서 인과에 따라 숙명적으로 체념해야 할 입장이라면 어떻게 이를 돌파하고 또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까? 그것은 참회뿐이다.

참회란 모두를 비우는 것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묵었던 감정과 풀리지 않는 생각들을 하나 하나 버리다보면 나중에는 자신을 비우게 된다. 자신이 없으면 결국 모든 대중이 나타나게 된다. 내가 없다는 것은 이웃과 가정과 사회를 위한다는 것이고 종국에는 이웃과 내가 하나라는 것을 알고 사업을 해야 하고 사회생활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세상은 독불장군이 없다고 했다.

물질도 비워야 한다. 창고에 쓸데 없는 물건이 잔뜩 들어 있다면 새로운 것이 들어 올 수 없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를 맞이해야 한다. 비우면 찬다고 한다. 차면 썩는다. 썩기 전에 스스로 비우자. 주위의 거리도 비우고 인간관계도 상생의 인연이 되도록 비워야 할 것이다.

애착과 미움이 많이 남아 있으면 비울 수 없다. 애착은 버려야 하고 미움은 용서하자. 용서하면 포용할 수 있다고 한다. 변화의 이치에 따라 나의 속박을 끊기 위해서 용서를 하자. 상대를 용서하면 결국 나를 용서받아 내가 해탈하게 된다. 불교의 팔만대장경도 한마디로 하면 잘 살자는 것이요, 기독교의 성경도 사랑으로 잘 살자는 것이다. 대종사님의 법도 마음 하나로 서로 잘 살자는 것이다. 자연이란 진리는 궁극에는 같은 이치이고, 시간에 따라 변하는 이치를 깨우치면 참 극락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인과를 끌고 가는 시간에 끌리지 말고 참회로서 모든 업장을 돌파해서 편안한 심락을 누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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