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깨치면 조각조각 분별하지 않는다"

▲ 은행나무 풍경.

〈정전〉의 '무시선법'으로 수행의 체를 잡고 있는 공부모임이 있다. 이름하여 '무시선회'. '무시선' 공부모임은 과천교당 교도들을 중심으로 서울 인근 교도들이 함께한다. 무시선 공부모임 장소인 과천교당은 관악산 가는 길목에 자리잡고 있어 푸른 숲속을 연상케 했다. 은행나무가 한아름 펼쳐져 있다. 신록을 만끽하며 푸른 숲을 바라보니 싱그러운 마음이 자리를 잡는다.

마음에 관한 이야기
김도형 교도의 사회로 진행되는 마음공부는 먼저 15분 좌선으로 마음을 고요히 한다. 입정을 하는 가운데서도 차 소리와 사람들의 말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도심속 무시선이다. 이어 〈정전〉 무시선법을 합독한다.

'마음거울'의 성가를 부른 뒤 라도현 교도의 마음에 관한 강의가 시작됐다. 라 교도는 "무시선법은 부처님의 말씀이며 소태산대종사 가르침의 핵심이다"며 "우리 자신을 끌고 다니는 주인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은행나무 이야기를 꺼냈다. 4월이면 어김없이 메마른 은행나무에 싹이 튼다. 너무 메말라 어떻게 싹이 틀까. 하지만 메마르지 않음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싹이 트고, 지금은 어느덧 짙푸른 잎사귀로 푸른 하늘을 덮고 있다는 것. 그는 여기서 "세월이 가는 것을 보며 생로병사의 이치를 자각해야 한다"고 마음을 일깨웠다. 자연은 내 인생에 물음을 던져주고 삶을 돌아보게 하는 촉매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가까이에 있는 글씨가 잘 안보이고, 머리에 흰 머리카락이 날 때, 그리고 주위의 인연들이 하나 둘 떠날 때 생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때나 선이요, 어느 곳이나 선방이라는 '무시선가'는 마음의 당체를 이야기 하고 있다. 라 교도는 왜 공부가 어려운가에 대해 되물었다. "대종사님이 가르쳐주신 공부길을 그대로 믿고 수행해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인데 공부인은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지 못하기에 마음공부의 장소를 찾고 분위기를 찾으며, 바빠서 또는 일이 많아서 못한다고 이유를 댄다. 이는 만고의 대법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러므로 무시선 공부는 내 마음의 자유를 얻자는 것이다. 마음이 텅비면 두렷해지고 행동이 올바르게 된다. 일원상이 내 몸가운데 작용한다.

그는 우리 마음의 진리를 극장의 스크린에 비유했다. 화면에 희로애락 탐진치의 감정이 나타나지만 화면이 바뀌면 사라진다. 분별주착이 없는 성품자리로 그냥 보고, 그냥 듣기를 주문했다. 아이들은 감정의 색깔과 모양을 보면서도 끌려가지 않는다. 분별심이 없기 때문에 제일 행복해 한다.

'이 법이 심히 어려운 것 같으나 닦는 법만 자상히 알고 보면 어찌 구차히 처소를 택하며 동정을 말하리요' 이 대목은 체험을 해야 한다.

자성의 정은 세우는게 아니라 세워진 것이다. 마음이 깨어있으면 자성의 정은 이미 세워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고요하게 비우고 분별을 놓으면 깨어남만 존재한다.

이 순간을 챙기지 않으면 영원히 수행하는 시간을 잊어버리게 된다. 분별을 잠깐이라도 쉬어보라. 그러면 법신불이 공적영지를 나툰다. 무시선 무처선이 되면 처처불상 사사불공은 저절도 따라온다. 키워드는 여기에 있다.

▲ 과천교당 법당에서 마음의 자유를 얻게하는 무시선 공부를 하는 모습.


즉문즉설

무시선에 대한 강의를 마치자 다과를 나누며 잠깐의 휴식을 가졌다. 이어 생활 속 문답감정이 계속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마음 관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는 김도형 교도는 "업무를 보다가 언성이 높아졌다. 화나는 마음을 보면 사라진다"고 말했다. 이에 라 교도는 "야구에서 주자가 1루에 나가있으면 투수가 1루 주자를 견제하기 위해 자꾸 본다. 분별심과 화가 올라올 때 보는 놈이 있다. 그러면 순식간에 물방울이 터지듯 없어진다. 보는 순간 허공이 된다"고 답했다.

박연석 교도는 "요즘 화두가 화로안에 눈, 그물안에 바람이다"며 "모든 순간 순간이 화로안에 눈 처럼 그물안의 바람 처럼 바라보면 집착하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부처님을 꿈속에서 만난 이야기를 털어놨다. 라 교도는 "금강경에서 모양이나 형상, 소리로 본 사람은 여래가 아니다"며 "그건 망상이다"고 일소시켰다. 자기 무의식의 세계가 꿈으로 나타난 것임을 일깨웠다.

이충원 교도는 "공(空)을 체험하고 싶다"고 말했다. 라 교도는 공부법을 제시한다. "의도적으로 무언가에 집중하는 연습을 하라. 나뭇잎을 집중하든지…. 그러다가 순식간에 돌이켜서 마음을 보라. 그것이 회광반조다. 마음의 모습, 실체를 깨닫게 될 것이다. 마음의 공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공체험은 무언가에 집착해서 순식간에 보는 것이다. 깨끗한 것을 통해 더러운 것을 볼 수 있고, 속박이 있어야 해탈을 하며, 추워야 따뜻함을 볼 수 있다. 몰입하면 텅빔을 안다. 결국 적적성성은 깨어있음이다."

사뭇 불교의 선문답을 연상케 했다. 묻고 답하는 열기가 뜨겁다. 체험의 온도가 전해진다.

▲ 강의를 하는 라도현 교도.


일체유심조의 비법

이법진 교도가 아들과 공부한 이야기를 드러냈다. 아버지에게 야단을 맞고 우울해 하는 아들에게 "드럼칠때 어땠냐" 물었다. 아들은 "그때는 화난 마음이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집에 올때 다시 슬프고 화나는 마음이 났다고 했다. 이때 엄마는 말한다. "네 스스로가 네 슬픈 마음을 지어냈다. 드럼칠 때 화나는 마음이 없는 것처럼 네 마음이 지은 것이다."

법당에 오면 교무님이 "향을 피우고 사배를 하라는 말이 약간은 거슬렸다"는 말에 라 교도는 일체유심조의 비법을 소개한다.

"일체유심조에는 예외가 없다. 마음을 알고 깨달으면 조각조각 분별하지 않는다. 그 대상이 거지, 정신병자, 예수, 벌레라도 이유가 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기 마음이 짓는 것이다. 법신불일원상이 향을 피우고 사배를 올린다.

마음을 아는 것이 첫째고 전부다. 마음이 말하고 마음이 듣는다. 경전도 마음이요, 의식구조도 마음이다. 기도, 해탈, 괴로움도 마음이다. 마음이 규정하는 것이다. 향을 피우고 사배을 올리는 것도 행위가 아닌 마음에 있다. 나의 본성인 법신불이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깨치는 것이 중요하다. 본래자리를 알아버리면 자유롭고 지혜롭다. 내가 그 마음자리에 있으면 부처의 몸이요, 마음이다." 공부내내 법당 유리창 사이로 은행나뭇잎이 흔들리고 있다. 바람의 흔적이 느껴진다. 마음까지 시원하다. 도심속 푸른 산이 물결치는 속에서 마음공부도 덩달아 춤을 춘다. 푸르름의 법잔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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