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세에 쌓은 복 후생에 받은 여인 '최일양대'

▲ 물돌이. 영산성지에서 응암바위를 지나 법성포 방향에 큰 소드랑섬과 작은 소드랑섬 전경.
영산성지를 방문하면 몇 해 전에 만들어진 백수 해안도로를 지나게 된다. 백수 해안도로는 영산성지에서 홍곡리까지 50리 길에 펼쳐져 있다. 성지 입구에서부터 해안 길을 따라 해당화 꽃은 30리 길에 피어있고 성지에서 해안도로 쪽으로 가다보면 삼밭재를 임도로 가는 이바리골을 지나면서 커다란 바위를 만나게 된다. 이 바위가 바로 응암바위인데 이 바위에는 조선조 사림의 거두였던 우암 송시열의 글귀가 바위에 새겨진 망화정을 지나게 된다.

지명과 설화

망화정이 있던 바위벽에는 송시열을 위시한 소두산(우암 문인으로 동래부사, 충청도 관찰사를 지냈다) 홍석기(영광군수 : 1669~1670) 송국사 등의 성명이 각인되어 있고, 한시가 각서 되어 있는데 글씨는 형체를 알아볼 수가 없고 자취만 남아있다. 전하는 글귀는 '재 구수응암하 우암송시열 장루지소 사림건축 영유허'로 전해진다.

응암바위를 지나면 법성포 방향으로 보이는 것이 작은 소드랑섬과 큰 소드랑섬을 만나게 된다. 이 섬들을 지나 굴비로 유명한 법성포가 나오고 이 포구를 지나 영광의 칠산 앞바다가 드넓게 펼쳐지는데 눈앞에 보이는 섬들의 이름은 일산도 이산도 삼산도 … 칠산도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옛 사람들은 칠뫼(일곱개의 산)라고 이름을 붙였다. 소드랑섬과 함께 칠산 바다라는 의미가 구인 선진을 의미한다고 선진들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다. 소드랑의 의미는 말 그대로 솥(鼎)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큰 소드랑섬과 작은 소드랑섬과 칠산 앞바다의 일산도부터 칠산도를 합하면 구산이 된다.

법성포는 예전에 동학운동이 한창 활발하던 현장이었다. 동학군이 무장을 경유하여 법성포에 당도한 것이 1894년이다. 원불교 교사에 4세의 소년 대종사가 "동학군이 몰려온다"고 하여 아버지가 놀라 대밭으로 숨었던 그 해의 일이다.

응암바위를 지나면 왼쪽편으로 골짜기가 나오는데 이 골짜기가 은선동이다. 은선동의 의미는 '신선이 숨어 사는 동네'라는 뜻이다. 이 은선동 골짜기를 1~2년 전에 두 번에 걸쳐 답사를 했는데, 삼밭재 정상에서 은선동 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사자암 터를 지나게 된다. 사자암 터는 이미 오래 전에 폐사가 되어 큰 흔적들은 보기가 힘이 들지만 암자 앞으로 물이 흐르도록 했던 배수 시설과 함께 요사채 주변 담장을 이루었던 돌무더기가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은선동에서 내려오면 저수지를 만나게 되는데 이 저수지 아랫마을이 한시랭이 마을이다. 원불교 교단사에 큰 획을 그었던 많은 분들을 배출한 동네이기도 하다. 이렇듯 성지 인근에 지명들은 도와 관련된 곳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최일양대 설화

한시랭이 마을을 지나 구수미를 지나게 되는데 이 구수미와 관련된 일화는 초기교단 간행물중의 하나인 〈회보〉46호에 '응보실화'라는 제목으로 승산 김형오 선진이 글을 실었다.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한 200년전 이 동리에 최일양대라는 여자가 있었다. 남편도 없이 홀로 여관업을 경영하여 살림을 운영하였는데 오고가는 행인들의 의복 빨래를 하여 다시 입혀 보내는 등의 선행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걸승을 만나게 되는데 걸승을 잘 대접하여 보냈는데 길을 떠나던 걸승이 "주인이 상없이 복을 열심히 닦은 공덕으로 미래 세상에는 선도에 환생하여 무수한 복을 받을 것"이라 예언을 했다.

세월이 흘러 최일양대가 생을 마칠 즈음에는 재산을 마을에 모두 희사를 하고 일생을 마무리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 공덕을 기려 무덤을 돌보았으나 이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찾는 이가 뜸하게 되었다.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영광군수가 부임했다. 군수 부인이 이 무덤을 찾아왔다. 사람들이 그 연유를 물어보니 이 부인은 태어날 때부터 왼손 주먹을 펴지 못하는 병을 앓았는데 남편이 영광군수로 임명되어 영광에 도임하자 주먹이 펴졌다. 손바닥에 '전세에 구수미 살던 최일양대'라는 글귀가 있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사람을 시켜 구수미 마을에 최일양대라는 사람이 살았는가 알아보고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알아본 후에 자기 전생사임을 알고 찾아오게 되었다. 이러한 설화로 사람의 인생사에서 지으면 받는다는 과보의 내역이 잘 드러나는 예화라고 소개한 바가 있다.'

이 무덤이 세월이 흘러 누가 돌보지 않던 차에 당시 영산교당에 근무하던 이선묵 교무가 교도들과 함께 묘소를 찾아 단장하고 묘비를 다시 세워 그 뜻을 기려왔고 인연 있는 이들이 방문을 했다. 이 일로 인하여 구수미 사람들은 최일양대가 원불교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 그러나 최일양대의 무덤도 백수 해안도로에 골프장이 들어서면서 결국 다른 곳으로 이장이 되고 말았다.

목맥마을과 목냉기

또한 법성포의 파도치는 모습을 다랑가지(多浪佳地)라고 했는데 그 의 의미는 파도가 물결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다랭이 논의 의미도 대략 같은 맥락일 것이다. 법성포는 칠산 앞바다로 향하는 관문인 동시에 조기를 잡던 뱃사람들은 식량이 떨어지고 그물 손질을 하려면 어김없이 법성포를 찾았다. 돔배섬을 지나 법성포로 들어오면 첫머리가 목맥마을인데 주민들은 '목냉기'라 부른다.

목냉기의 의미는 칠산 앞바다에서 조기 파시로 돈을 번 선원들이 이 마을을 지나면 고생해서 번 돈을 지니고 집으로 갈 수 있었으나 목냉기에 줄지어 늘어선 주막을 선원들이 넘어서지 못하면 집으로 가져갈 돈을 선창가 유곽에 다 털리고 말았다고 한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목을 넘긴다'는 목냉기이다.

교단 초창기에도 이 목냉기에서 돈을 번 여인들이 법성포에서 배를 타고 선진포까지 들어와 영산성지에서 재배하던 복숭아를 사서 먹고 놀고 갔다고 한다. 〈대종경〉에 나오는 술집 여인들이 바로 법성포와 선진포 등에서 장사를 하던 여인들이다.

영산성지와 이웃한 곳곳은 다양한 설화와 역사 이야기가 담겨졌다. 이는 이 땅에 살았던 민초들의 삶과 애환을 그대로 담아내는 현장임을 말해준다. 유약을 바르지 않은 질그릇 같은 느낌이다. 땀 냄새 가득한 그 시절 이야기들이 바람결에도 스쳐온다.

<영산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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