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 기도는 이웃과 세상 위한 '이타(利他)' 행위

8월 법인의 달을 맞아 본지에서는 '종교와 문화-기도'에 대해 기획했다.
1주 '종교문화에서 기도' 2주 '법인절 문화 창출 어떻게'라는 좌담, 3주 '출가교무의 기도체험', 4주 '기도하는 교화단-교도 체험중심'으로 게재된다.
종교(宗敎)의 두 가지 어원

종교라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으뜸이 되는 가르침' 또는 '가장 큰 가르침'이라는 뜻이요, 다른 하나는 '근본으로 돌아가다'라는 뜻이다. 전자는 대체로 유교와 불교, 도교 등 동양종교에서 강조되어 온 전통이며, 후자는 대체로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서양종교에서 강조되어 왔다. 동양종교의 전통 속에서는 특히 '도(道)' 또는 '학(學)'이란 용어가 '종교'라는 말을 대신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종교라는 말의 어원이 어찌됐든 동서양 모두 종교는 민중들의 절대적인 귀의처 역할을 해왔다. 예를 들면, 불교에서는 불보살의 절대적인 힘을 빌려 복을 빌며 재앙을 소멸하려는 전통이 오래 전부터 유행되어 왔다. 그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민중들을 사로잡은 '미륵신앙'이다.

미륵신앙을 통해본 종교문화

석가모니 부처님은 2천5백여 년 전에 이 땅에 오신 현재불(現在佛)이었다면, 미륵 부처님은 먼 훗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오실 메시아적 미래불이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을 정도로 현실의 고통이 엄중했던 전통시대 민중들에게 미륵은 메시아 그 자체였다. 인간은 누구나 앞날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품고 현실의 고통을 견뎌낸다. 더욱이 서럽고 압박받는 민중들의 경우 유토피아와 같은 미래에 대한 갈망은 더욱 간절해지기 마련이다. 바로 그 '그 날'을 가져다주는 존재가 미륵 부처님이었다. 미륵 부처님은 우리 역사에서 주로 시대가 바뀌는 전환기와 현실의 고통이 엄중했던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민중 속으로, 마을 속으로 들어왔다. 나말여초와 여말선초, 조선후기가 바로 그런 시대였다.

우리나라 전국 각지 마을 마을에는 수많은 미륵 부처님이 계신다. 남으로는 제주도부터 북으로는 금강산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서해안의 영광 법성포에서부터 동해안의 삼일포에 이르기까지 미륵 부처님이 아니 계신 곳이 없을 정도이다. 그리하여 미륵 부처님은 고색창연한 사찰을 떠나 이름 없는 민초들이 사는 마을로, 들로, 바닷가로, 그렇게 농사짓고 고기 잡는 민중들의 삶의 현장으로 걸어 들어와 우리의 문화가 되고 전통이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미륵 부처님은 새로운 왕조 개창이나 새 종교운동의 구심적 역할을 하기도 했다. 후삼국 시대의 궁예가 미륵 부처님에 가탁하여 스스로 미륵불의 현신(現身)임을 자임했던 것, 조선후기 빈발했던 민란(民亂)의 주모자들이 미륵불에 가탁하여 변란을 도모하려 했던 것, 그리고 계룡산과 모악산 일대에 자리했던 수많은 새 종교들이 모두 미륵불과 관련된 것 등이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

이처럼 우리 문화 깊숙히 침투한 미륵신앙은 다름 아닌 초월자를 향한 민초들의 소박한 기도(祈禱)와 원망(願望)이 반영된 종교문화의 전형적 사례라 할 것이다.

기도와 종교문화

종교문화의 핵심적 요소의 하나인 기도란 무엇인가? 기도란 신(神)이나 불(佛)과 같은 초월적 존재와의 소통을 목적으로 행해지는 종교의례의 한 형태라 정의할 수 있다. 기도는 행위자의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동기에서 비롯한다. 절대자나 초월자에게 자신의 삶의 상황에서 연유하는 청원(請願), 신뢰, 감동, 결단 등이 기도를 통하여 표출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느님이 보고 계신 것은 표현 방식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다"라는 격언은 기도의 자발적 성격, 자유로운 형식을 잘 드러내주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종교가 제도화됨에 따라 각 종교 전통 속에서 기도도 일정한 정통적 규범에 의하여 정형화(定型化)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독교의 주기도문(主祈禱文)은 그러한 정형화되고 표준화된 기도의 전형적인 예라 할 수 있다.

기도는 본래 종교경험의 자연스러운 표출 행위이다. 따라서 반드시 정형적일 필요는 없다. 가톨릭의 기도는 이러한 점을 감안한 포괄적인 이해를 담고 있다. 가톨릭은 기도를 구도(口禱)와 염도(念禱)로 나누고, 구도를 다시 전례기도와 비전례기도로 나누어, 비전례기도에는 공동기도와 개인기도를 포함시키고 있다. 한편 염도는 묵상, 감동적 염도, 단순 염도, 신비적 염도 등으로 나누어 이해하고 있다. 가톨릭의 기도 이해는 동양종교에서 강조하는 명상이나 성찰과 유사한 측면이 있다. 모든 명상이나 성찰은 어떤 절대적이거나 초월적인 존재나 원리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기도와 근접하고 있고, 모든 기도는 그것이 신적인 존재와의 인격적인 소통이라 할지라도 자신으로부터 연유하는 사색의 흐름을 수반하지 않을 수 없는 점에서 명상이나 성찰에 근접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도에 대한 이 같은 폭넓은 이해는 기도가 서양의 유신론적 종교전통에서만 나타나는 고유한 것이 아니라 모든 종교에 공통되는 종교의례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구체적으로 불교에서도 기원, 기념(祈念), 기청(祈請), 심원(心願) 등의 표현을 빌려 제불여래(諸佛如來)에게 '빌어' 그 감응을 통하여 법신(法身)이 나에게 현현하도록 하는 것을 기도라고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송경(誦經)의 공덕을 강조한다든지, 선(禪)의 신비적 합일을 인정하는 것 등은 모두 기도의 개념을 광의로 해석할 때 포용될 수 있는 종교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종교전통 속의 기도

우리나라 종교전통 속에서 기도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우선 무속신앙(巫俗信仰)에서 치성(致誠)드리는 행위가 바로 기도에 해당한다. 치성은 부적(符籍)의 효험이 잘 나타나지 않을 때 행해지는 의례행위인데, 굿보다는 단순하고 또한 사제(司祭)의 매개를 요청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굿의 하위의례라 할 수 있다.
동학(東學)과 천도교에서는 기도라고 하는 용어를 수도 또는 수행행위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의례의 일부로 기도도 아울러 인정하고 있다. 그것이 나타난 것이 바로 주문(呪文)과 축문(祝文)이다. 주문을 외우는 것은 신자들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의무로 과해지고 있으며, 참회문을 포함한 축문 낭독은 특별한 감응을 기대하면서 행해지고 있다. 한편 비정형화된 기도는 심고(心告)와 일상생활 속의 기도로 나누어진다.

증산교에서는 조화법리(造化法理)를 체득하기 위한 수련의 첫 단계로 기도를 강조하고 있다. 즉 처음 입교한 신자에게는 반드시 참회와 기도로 심수응신(心隨應神), 신인합발(神人合發), 신판신결(神判神決)을 터득하게 하여 새 사람이 되게 하고, 태좌(胎坐)와 정심(正心)으로 산심(散心)을 제거하며, 송주로 연력(鍊力)을 쌓아 난경을 극복할 수 있는 인격을 함양하게 하고 있다.

유교의 경우에도 기도로 볼 수 있는 의례를 찾아볼 수 있다. 유교에서는 인간이 신이나 초월자에게 바치는 의례를 배(拜), 축(祝), 헌(獻)으로 나누는데, 이 경우 축(祝)이 바로 기도에 해당하는 의례이다. 축이 초월자와의 언어적 소통양식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늘에 죄를 지으면 빌 곳이 없다(獲罪於天 無所禱也)"라는 공자(孔子)의 말은 유교에 내재된 기도의 특징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할 것이다.

원불교의 기도 문화

기도는 종교의례 가운데 가장 핵심을 이루는 의례이다. 기도는 개인의 실존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칠 뿐만 아니라, 한 사회의 공동체적 삶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 기도는 양면적 성격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진정한 자기발견이라는 긍정적 측면이요, 다른 하나는 환상(幻想)에 대한 자기투척이라는 부정적 측면이다. 이 같은 양면적 성격에도 불구하고 기도의 가장 궁극적 역할은 기도를 통한 초월적 존재와의 소통과 그 같은 소통을 통한 초월적 의미의 자기내면화, 그리고 그 내면화된 초월적 의미를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실현하는 데 있다.

원불교를 개창하신 소태산 대종사는 구도과정에서 5년간에 걸친 기도 생활을 경험한바 있으며, 그 같은 기도생활에서 보여준 정성일념을 일관함으로써 마침내 대각(大覺)이라는 종교체험을 통해 초월적 의미의 자기내면화 경지에 이르렀다. 그리고 대각 이후 소태산은 남은 생애 모두를 '초월적 의미의 사회화'를 위해 바치셨다. 뿐만 아니라,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에는 9인 제자들로 하여금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 주기를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天意)에 감동이 있게 하는" 기도를 봉행하도록 명하신 바 있다.

이처럼 원불교의 기도의 원형은 자기 자신의 구복(求福)을 위한 '자리(自利)'에 있지 아니하였다. 오히려 원불교 기도의 오랜 전통은 이웃과 세상을 위한 '이타(利他)'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했기에 2대 종법사 정산종사께서도 '자신을 위한 기도보다는 이웃과 세상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강조하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끝으로 원불교도 역시 정형화된 기도 외에 비정형화된 기도도 인정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심고(心告)가 바로 비정형화된 기도이다. 그러므로 원불교인이라면 누구든지 정형화된 '기도'와 비정형화된 '심고'의 생활화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초월적 존재와의 소통을 이루고 진정한 자기발견을 통해서 이웃과 세상을 향한 초월적 의미의 공동체적 실현에 앞장서야 하겠다.
▲ 박윤철 교수 /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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