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법 만난 것 내 생의 가장 큰 기쁨"

▲ 김정윤 교도가 대종사 열반 사진이 담긴 앨범을 들여다보며 당시를 회상했다.
정갈한 올림 머리로 평생을 살아온 서면교당 창립주 김정윤(88) 교도. 김 교도는 대종사 열반 당시 사진이 든 앨범을 곁에 두고 틈틈이 펼쳐보는 노년을 보내고 있다.

그는 "이 앨범도 이공주 종사에게 돈을 2배나 주고 산 것이다"며 "훗날 이공주 종사가 '내가 잘 못 알고 돈을 많이 받았다'고 돌려준다는데 그냥 두라고 했다"고 말했다. 공가 살림 하는 어르신인데 그 돈 역시 공을 위해 쓰기 때문이다.

19일 대종사를 친견한 교도로 서면교당을 창립한 김 교도를 만나기 위해 부산 개금동의 신주공아파트를 방문했다. 현관문을 활짝 열어놓고 기다리는 그는 "내가 이제는 다 늙어서 총부도 자주 가지 못해 어른들도 찾아뵙지 못해 너무 죄송하네예"하며 부산 사투리로 인사를 건넸다.

미수인 김 교도의 일상

혈약형이 O형인 그는 지난해부터 빈혈이 심해 매월 14일 수혈을 받는 날이다. 하지만 이번 8월은 더위에 지쳐 아직 가질 못했다고 최근 근황을 말했다. 김 교도는 "교당은 목숨 걸고 다니고 있다"며 "교당 법회를 빠질 수는 없어 택시타고 매주 근근이 법회는 나가고 있지만 교당의 다른 일을 봐 줄 수 없어 죄송하다"고 말했다. 교당 창립주로 건강할 때는 크고 작은 교당 일을 수시로 드나들며 추진 해왔다. 이제는 그 일을 며느리인 이성호 교도가 뒤를 이어 해 내고 있다.

김 교도는 첫 눈에 보기에 '선이 굵은 공부'를 한 사람으로 보인다. 그는 "일생을 '처처불상 사사불공,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의 공부 심경을 놓지 않았다"며 "밖의 사람들과는 친구도 하지 않고 교단 이외의 사람들은 잘 만나지도 않고 교당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요즘 관절이 안 좋아 누워있는 시간이 길어졌다"며 "누워 있으며 생각해 보니 처음 초량교당 다니면서 서면교당 따로 냈을 때가 가장 기뻤다"고 그때를 기억했다.

대종사의 열반 사진이 담긴 앨범을 넘겨보면서도 "그때도 일직심으로 이 공부 할 마음뿐이었다"며 "어쩌다 복이 없어 재가교도로 머물기는 했어도 이것이 내가 이생에 해야 할 숙제였지 싶다"고 말했다. 그 숙제를 하기 위해 오로지 살아온 일생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는 앞으로 남은 일에 대해 "자녀들과 손자녀들이 신앙심이 깊어져 공부 사업을 해 나갔으면 한다"고 말했다. 가족들이 사회적으로 자력생활을 하니 이제는 내면의 깊은 공부로 유도하고픈 어머니의 마음인 것이다.

대종사와 첫 만남

그가 초량교당에서 조전권 종사(이하 공타원)를 만난 것은 13세 때이다. 15세에 학교를 졸업하고 고모를 따라 초량교당에 본격적으로 다녔다. 그때 공타원 종사는 "너 이리 불법연구회에 가서 공부한번 해 보지 않을래"하고 김 교도를 탐냈다. 당시 초량교당에는 김 교도의 가족과 친척들이 주로 교도였다.

김 교도는 공타원 종사에게 몇 차례 권유를 받고 '오빠가 나를 미워하는지 일만 시키니 공부하러 가 볼까'하는 생각도 많았다. 하지만 쉽게 공부하러 가겠다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어느날 공타원 종사는 "이번에 총부에 가서 대종사께 여쭤보고 '데려와라'하면 기별을 하고 '그냥 둬라'하면 소식이 없을 테니 그리 알고 있어라"하는 말을 남겼다. 김 교도는 "일주일 쯤 지났을까. 총부에서 연락이 온기라. 대종사님께서 올라와도 된다카는 소식을 받은 거제"하고 기쁨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당시 원기28년 3월 불법연구회 총회 기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남부민교당 송자명 교무와 다른 교무 1명, 나까지 3명이 기차를 타고 총부를 찾아 간 것"이라고 기억을 더듬었다. 김 교도는 부모에게 허락을 받지 못하고 홀홀단신 공부하러 총부까지 온 것이다.

총부에서 세탁부 학원방에 기거하던 때, 하루는 부산에서 오빠가 왔다는 소식을 받았다. 김 교도 오빠는 "다 큰 처자를 부모 허락도 없이 데려 갔다고 고발할 것이다"며 큰 소리를 쳤다. 화가 난 오빠를 대종사는 조용히 불러 독대를 했다.

김 교도는 "한참 후에 오빠는 조실에서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다"며 "아마도 대종사님 말씀에 감명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된다"고 말했다.

김 교도는 "오빠가 가고 내가 송대에 있을 때 대종사님이 오시더니 '부모님 상심이 크다는데 어떻게 할래' 하시기에 '어머니 성격이 본래 그런다'며 '안심하셔도 된다'고 말씀드렸다"고. 김 교도는 "나는 부산으로 가라고 하면 어쩌나 하고 가슴 졸였는데 가라는 말씀을 안 하시니 너무 기뻤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공부하러 온 여학생들을 돌려보내기도 한 때였기 때문이다.

매일 세탁부에 온 대종사

당시 21세였던 김 교도는 세탁부 일을 도우며 총부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대각전으로 향하는 대종사를 뵐 때면 인사를 드렸다. 대종사는 "그래-"하며 인사를 받고 지나갔다. 그는 "직접적으로 뵙기는 했으나 워낙 높으신 어른이닌깐 뭐라도 여쭐 말도 없이 인사만 했다"고 기억했다. 그리고 세탁부에 만난 대종사에 대해서 "내 기억에 대종사님은 매일 세탁부에 오셔서 검은 법복 바느질 하는 일을 간섭하시는 기라. 내 딴에 '대종사님이 어째 바느질하는 것 까지 급하게 재촉하실까'하고 생각했다"고.

김 교도는 "대종사님이 열반하시고 난 후에 그 뜻을 알은 기라"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내가 총부 간지 3개월 만에 대종사는 열반에 드셨다"며 "열반하신 후 검은 상복 입은 사람 200여 명만 상여를 따라가게 했다"고 말했다. 그런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더 열심히 했을 것이라며 아쉬워했다.

김 교도는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대종사님이 내 출가를 반대 안 하신 것이 참으로 큰 은혜이다"며 "당시 대종사님이 '정윤이는 남들보다 지혜가 있어서 공부도 3년이면 될 것이다'고 칭찬했다.

대종사 열반 이후 교단엔 큰 시련이 닥쳤다. 일본의 탄압이 가중되어 집단생활이 어려워졌다. 총부에 있던 여자청년들도 정신대를 면하기 위해 공장과 병원으로 취업을 했다. 김 교도는 공장이나 병원으로 가고 싶었으나 총부의 한 간부가 "너는 집에 가 있으라"고 했다고. 그는 "워낙 어렵고 긴박한 시절이라 나도 공장으로 보내달라는 말을 할 처지가 못 되었다"고 회상했다. 그렇게 3년 만에 집으로 돌아온 김 교도는 부모와 오빠의 손에 붙들려 광복 이후에도 총부에 가지 못했다.

마음속에 그리움의 고향으로 자리한 총부. 미수를 맞은 그는 요즘도 눈을 감으면 67년 전의 세탁부, 송대, 대각전을 오르내리며 대종사의 발자취를 찾는다. 그리고 함께 어울려 살았던 동무들과 스승의 얼굴을 떠올리며 반갑게 만난다. 잠시 후 눈을 뜨며 "이 법 만난 것이 내 생의 가장 큰 기쁨이었지"하며 미소 짓고 합장을 한다. 그 마음으로 이 생을 마치고 싶다는 의미이다.

김 교도는 "목숨을 내 놓고 교당가는데 나는 이미 삶과 죽음을 하나로 알어"하고 말했다. 공부로 일관한 수행의 힘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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