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의 맵씨를 살리는 선

한옥이 시원하다고들 한다.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가 잘 안 된다는 듯 궁금한 얼굴이 되지만, 살아 본 사람들은 저절로 고개가 주억거려진다. 실제로 시원하기 때문이다. 냉방 시설이 있는 현대적인 건물에서만 살아 본 사람은 한옥의 시원함을 모른다. 한옥의 시원함은 바로 처마에 있다. 적당히 내민 처마로 인하여 일조량이 조절되어지기 때문이다.

한옥의 처마는 우리나라 중부지방의 경우 대략 4자 정도가 된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조금 더 나오기도 하고 함경도지역으로 가면 3자 정도로 짧게 한다. 이는 태양의 남중고도(南中高度)와 관계가 있다. 하지(夏至) 날 정오에는 태양이 머리위에 있어서 처마의 그림자가 기단(基壇)밖으로 떨어진다. 하지만 동지(冬至)날에는 따뜻한 태양 볕이 방안에 까지 들어온다. 이 태양의 높이를 감안하여 처마의 깊이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기단에 떨어지는 눈, 비, 서리도 막아준다.

추운 겨울에는 따뜻한 온돌에서 주로 생활하지만, 여름에는 마루에서 생활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대청마루는 대개 전면이 개방되어 있고, 후면은 막되 한 칸에 두 짝씩의 바라지창을 단다. 이 바라지창을 열면 후원이 내다보이고 장독대나, 대숲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가 많다. 유실수를 심어두기도 하여 후원은 비교적 시원한 공간으로 만들어 놓는다. 그런가 하면 앞마당은 백토를 깔아 깨끗하게 비워둔다. 농사일에도 제격이지만, 하얀 마당에 반사된 햇빛은 집안을 밝고 명랑하게 해준다. 옛집 앞마당에 잔디 심는 걸 본 적이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운 여름 뙤약볕에 달구어진 마당의 공기는 상승기류를 형성하면서 위로 올라가고, 그 빈자리를 처마 아래와 후원의 시원해진 공기가 대청을 통하여 앞마당으로 나온다. 자연스럽게 대류현상이 생기는 것이다. 바람이 불지 않는 날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바람기를 느끼게 해 주어서 무더위를 누그러뜨려 준다. 바로 처마가 갖는 효능이다.

겨울철 동네 아이들이 모여 앉아서 노는 곳이 바로 양지바른 처마 밑이다. 시골에서 놀만한 장소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다. 햇볕으로 따뜻해진 처마 밑의 공기는 처마로 인하여 밖으로 바로 흩어지지 않는다. 자연 그곳으로 아이들이 모여들기 마련이다. 처마는 수평이 아니고 아래로 경사진 것이어서 따뜻해진 공기가 조금은 더 긴 시간 머물게 만든다.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은 기단 밖으로 떨어져야 한다. 기단의 폭이 제한을 받는 이유이다. 기단을 높게 하고 마루를 높게 하려는 의도는 모두다 습기로부터 멀어지고 싶기 때문이다. 습기는 집안을 무겁게 하고 사람들에게는 여러 가지 병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처마가 높아지면 그만큼 깊게도 하여야 한다. 궁궐이나 사찰의 중요한 전각들은 그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서라도 처마를 높게 한다. 무조건 기둥만 높게 하면 처마를 깊게 할 수 없다. 그래서 다양한 형태의 공포(貢包)를 만들어 구조적으로도 안정감 있고, 시각적으로 아름다운 외관을 갖추게 하면서 자연스럽게 처마를 깊게 한다.

처마 아래의 공간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통행로의 역할이다. 쪽마루를 놓게 되는 것도 처마부분으로 역시 통행에 도움을 준다. 통행이 별로 없는 부분에는 농기구 등 여러 가지 가재도구를 놓아둔다. 언제든지 꺼내들기 가장 편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바람이 잘 통하는 부분의 외부 인방이나 기둥에 못을 박고 마늘이나 시래기를 조금 높게 걸어두기도 한다. 어렸을 적 기억으로는 굴비도 걸어두었었다. 겨울철에는 잔뜩 쌓아둔 장작을 보면서 흐믓한 마음이 되기도 한다.

한옥의 평수가 좀 작은 듯해도 그 보다 넓은 아파트에 비해 작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할의 처마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처마 밑의 공간은 밖이면서 집안과 같은 개념이 되기도 한다. 또한 중방 위쪽으로 다락이나 시렁을 내다는 경우도 많다. 집의 측면이나 후면의 처마 밑 공간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로 더러는 하방까지 내려온 경우도 있다.

처마에는 서까래만 있는 홋처마와, 부연이 설치되어 있는 겹처마로 구분된다. 조선시대의 살림집에는 원칙적으로 부연의 설치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지금 남아있는 옛 살림집들은 대부분 홋처마인데, 궁궐이나 사찰, 관아 등의 중요 건물들은 거의 겹처마로 되어 있다. 조금이라도 권위적이거나 중요한 집에서는 겹처마를 원칙으로 하였다.

한옥에서 가장 아름다운 부분의 하나가 처마선이라고 한다. 처마의 끝이 이루는 선을 두고 이르는 말이다. 이 처마의 선은 대부분 곡선이다. 긴 회랑의 경우 직선으로 될 수밖에 없지만 일반적인 집에서는 곡선으로 나타난다. 팔작지붕의 경우, 정면에서 바라보면 양쪽 끝이 위로 올라가는 곡선을 앙곡(昻曲)이라 하고, 밑에서 올려다보면 양쪽 끝이 밖으로 휘어져 나가는 곡선을 안허리곡이라 한다. 잘 지은 집을 살펴보면 처마의 앙곡과 용마루의 곡이 잘 어울려 있음을 본다. 맞배지붕의 처마는 거의 수평으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약간의 앙곡을 가지고 있다. 실제로 수평으로 해 놓으면 양쪽 끝이 처져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잘못 보는 현상을 착시(錯視)현상이라 하는데, 이 착시현상을 미리 교정해 준 것이 처마의 앙곡이다. 용마루를 곡선으로 하는 것도 같은 원리이다.

팔작집에는 모서리마다 추녀가 설치되고 겹처마집에서는 추녀위에 사래가 올라간다. 추녀가 있는 집에서는 선자서까래가 걸리게 마련이다. 부채살처럼 처마의 모서리 부분에 설치되는 선자서까래는 처마의 백미라 할만하다. 마지막 평서까래로부터 추녀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위로 치켜 올리면서 설치되는 선자서까래가 바로 처마의 곡선을 결정지어주기 때문이다. 이 처마의 곡선을 결정하는 사람이 바로 도편수(都邊手 또는 都片手)이다. 최종적으로 집이 잘 되었는가 못되었는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하여서 도편수들은 이 곡선을 결정하는데 나름대로 고심을 한다. 이 곡선 잡는 것을 도편수들은 "매기" 잡는다고 한다.

선자서까래는 뒤 뿌리를 점점 가늘게 하여 중도리위에서 모두 모이게 하는 서까래로 보통의 평서까래보다 다듬기도 어렵고 정확한 각도를 맞추기가 어렵다. 이웃나라인 중국에서는 그 기법이 현저히 쇠퇴해 있고, 일본에서는 아예 그 자취를 감추어 가고 있는 실정이다. 그만큼 어려운 작업인 것이다. 도편수가 되려면 이 선자서까래를 잘 다룰 줄 알아야 된다고 한다.
▲ 황성우
한국문화재수리기술자협회 기획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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