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광 교무·원광대학교(논설위원)
어떤 사회든 그 사회 구성원을 제반 분야에서 기본적으로 평등하게 대해야 한다는 주장(수평적 평등모형)과 함께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평등이라는 주장(적합성 모형)이 공존한다. 사실 단순한 남녀의 성차를 넘어 구성원간 다양한 문화의 차이가 엄연함을 부인하기 어렵다. 요즘 다문화 사회는 특정 문화 중심의 사회 보다는 다원가치를 존중하는 사회 즉, 차이를 수용하는 경향을 제기하지만 여기서도 역시 정체성과 다름 간의 긴장과 갈등이 있다.

물론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어떻게 하면 평등과 차이라는 두 가치 사이의 균형과 조화를 이뤄낼 것인가이다.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은 구성원의 몫으로 남는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 사회, 문화의 수준과 발전도 가늠될 수도 있다.

그토록 평등이니 공동체주의를 주장한 체제 아래서 그 이념은 왜 비판과 아울러 수정을 요구받는가를 눈여겨 볼 필요도 있다. 일방적으로 집단이나 사회를 위해 희생을 강요받는 공동체주의가 경계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한편 시장경제를 쫒는 업적주의 사회라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 경쟁력은 단순한 경제만이 아니라 의사결정의 힘, 문화도 자본재와 같은 위력을 지니게 됨에 따라 이로부터 소외된 계층은 이른바 재생산구조의 희생양이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어떤 이념이나 제도의 이름으로 평등과 차이에 대한 처방을 내린다 해도 한계는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어떤 차선의 선택이 삶의 질을 보전하는데 보다 도움이 될 것인가를 고려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교단 내에서 평등과 차이의 이분법이 정당화되는 대표적인 통로 중의 하나는 지자본위이다. 그 나머지 학력, 성별, 출신배경,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배경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불변의 진리 당체에서 보면 성품은 평등한 것인데 변화의 세계에서는 수많은 차이가 존재하는 것을 어떻게 인식하고 수용할 것인가가 문제이다.

제도는 바로 이런 평등과 차별을 담아 놓은 그릇에 비유될 수 있다. 그릇은 만든 사람의 의도에 따라 때로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화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실제는 녹록지 않다. 그런데 구성원 간에 갈등이 초래되는 것은 평등과 차이의 원인에 대한 공유지대가 박약한데 그 한 원인이 귀착될 수 있다. 우리는 평등과 차이의 원인을 개인에게 귀인시키는 것에는 비교적 익숙한 편이다. 반면에 그 원인이 개인 보다는 교단 구조나 제도에 귀착된다면 어떨까 반문해 본다. 만일 종교에서도 평등과 차이가 정당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종교라는 이름 아래 그 원인을 개인 인과로 돌리기만 한다면 이는 능사는 아니다.

기회가 균등하게 배분되는 평등사회, 공정한 규칙이 적용되는 사회이면서도 제도나 틀이 잠재된 개인의 능력을 소진시키거나 사장시키지 않는 사회, 공정한 평등성과 차별성을 함께 인정하고 수용하는 사회가 인간이 호흡하는 사회요, 건강한 사회이다. 이제 제도라는 틀이 갖는 보다 중요한 의미는 궁극적으로 삶의 질을 결정해주는 변인으로서의 역할 여부에 관심이 집중될 것이다. 제도에 담아야 할 중요한 가치 중의 하나가 배려라면 평등과 차이는 적절하게 조절되고 고려되어야 한다. 교단에 인적 자원의 부족은 적어도 구성원에 대한 평등성과 차별성의 적절한 반응도 무관치 않다. 양자의 긴장과 갈등보다는 조화와 균형을 제도에 담아보자. 물론 제도가 인간위에 군림하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적어도 지침이 되도록 공유해 나가는 노력마저 저버릴 수는 없다.

교단의 제도 변화가 구성원의 타는 목마름을 속 시원하게 적셔주기에는 부족하지만 밝은 미래를 보여주는 희망으로 채워간다면 길이 보일 것이다. 교단내 아름다운 전통마저도 우리들만 향유하는 만찬이 아니라 시공을 넘어 호흡하는 위대한 유산으로 살아 숨 쉬도록 하려면 평등과 차이의 조화에 대한 새로운 긴장과 지혜가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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