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여인에서 엿장수까지 모두의 필수품

철컥! 철컥!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어렸을 적 고무신, 책, 고장난 라디오 따위를 몰래 들고 나와 엿장수 앞에서 군침을 흘리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때 뭐니 뭐니 해도 신기에 가까울 정도로 화려하면서도 빠르고 정확하게 가위를 놀리는 손놀림은 엿장수의 필수 덕목이요,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다.

비단 엿장수뿐이겠는가? 바느질을 하던 아낙네들에게는 실과 바늘 못지않은 필수품이 바로 가위였다. 이처럼 가위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리 생활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도구 중 하나다.
동네 음식점에서 코흘리개 꼬마까지 많은 이들이 가위를 이용하는 것은 단순한 사용방법과 그 편리함 때문일 것이다.

가위의 원리

가위는 단순한 사용방법처럼 그 원리도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지렛대의 원리에 바탕을 두는데 지레의 작용점, 받침점, 힘점의 상호관계에 의해, 힘점이 작용점과 받침점 사이에 있는 원지점식, 지레의 받침점이 힘점과 작용점의 사이에 있는 중간지점식, 작용점이 힘점과 받침점 사이에 있는 선(先)지점식의 3가지로 구별된다.

따라서 응용한 가위도 3종으로 대별된다. 원지점식에 속하는 것으로 손자수용 가위·잎따기가위·망베기가위 등이 있고, 중간지점식에 속하는 것으로는 재단가위·꽃가위·전정가위·전지가위·잔디가위·의료가위 등이 있다. 선지점식에 속하는 것은 눌러서 자르는 가위와 과실따기 가위 등이 있다.
그렇다면 가위는 언제부터 사용되기 시작했을까?

서양에서는 헬레니즘시대부터 존재했고 중국은 전한시대의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실 서양에는 이집트 제18 왕조시대의 청동제 가위라는 것이 있으나, 가위의 날이 바깥으로 향하고 있어서 가위라고 하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동양에서는 후한에서 송에 이르는 시대의 무덤 부장품으로 두 개의 날 뒤끝이 용수철로 된 철제 가위가 비교적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형태는 뒤끝의 용수철이 8자형으로 된 것이 대부분이며, 시대에 따른 형식의 변화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2개의 가위 날의 지점이 손으로 누르는 부분(힘점)과 날과의 중간에 있는 형태의 가위는 현재 알려진 바로는 당나라 시대의 것이 최초다.

발견된 가위는 창사 계화원의 여성 무덤에서 출토되었는데 점토판을 구워서 만든 '동진 승평 5년(361)'이라고 기록된 부장품 품목에 바늘 및 다른 재봉구들과 나란히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재봉용임을 알 수 있다.

국내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유물은 신라시대에 창건된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원시형의 가위인데 형태는 한 장의 철판으로 만든 형의 것으로 손잡이가 없고, 두 개의 가위날이 서로 엇갈리도록 밑부분이 가늘게 둥글려 있다.
이것은 양날 부분에 옷감을 물리고 가위 등을 눌러 잘랐을 것으로 짐작된다.

형태로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라 분황사 석탑에서 나온 것과 같은 형의 것이고, 또 하나는 현재의 가위와 같은 X형의 것으로, 손잡이의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유물 가운데 ∞형으로 되어 있는 것의 하나는 길이 12.7㎝로 작은 동제가위이다. 가위날 부분이 약간 긴 세모꼴로 되어 있고, 그 위에 누금세공과 같은 기법으로 당초문이 놓여져 있다. 손잡이는 없으나 날을 조절하고 누를 수 있는 부분은 가위날보다 좁은 통형으로 구부려 놓았다. 또 하나는 길이 29㎝의 철제가위이며 가위날 부분이 긴 네모꼴로 되어 있다.

손잡이는 가위날보다 좁은 통형을 밖으로 구부려 고리형을 만들어 좌우 동형인데, 고리의 크기가 작은 것, 큰 것 등 일정하지 않다. 가위의 길이는 대개 19∼24㎝이다. 조선시대의 가위는 고려의 것과 비슷한 X형의 것이 대부분이며, 손잡이모양이 고려 것보다 좌우로 넓어진 것이 특징이고 모양도 다양하다.

가위의 경우 실생활에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도구라는 점 때문에 대부분 실용성이 강조된 경우가 많다. 그러나 모든 가위가 실용성만을 고려해서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통일신라 시대에는 삼국의 전통에 당의 문화가 가미 되어 다채로운 무늬, 다채로운 양식의 기와와 전돌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종래의 단순소박한 단판과 연꽃무늬 양식에서 벗어나 연판의 내부에 자엽이 새겨지고 주연부에 구슬무늬가 배치되면서 복판, 중판, 혼판 등으로 변천한다. 무늬도 보상화(寶相華), 인동(忍冬), 초화(草花) 등의 식물, 봉황, 기린, 사자, 가릉빈가(迦陵頻伽) 등 벽사와 길상을 의미하는 새나 짐승의 무늬가 등장한다.

이러한 변화는 생활용품인 가위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안압지에 출토된 금동촉협은 초의 심지를 자르는 데 사용하던 것으로 보여진다. 잘린 심지가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날 바깥에 반원형의 테두리를 세워 기능성을 더하고, 손잡이에 방울무늬와 덩굴무늬를 화려하게 장식해 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재료 역시 금과 동 등을 섞어 만들었는데 초 심지를 자를 이 가위만으로도 당시의 화려했던 궁중생활을 짐작할 수 있다.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하면서 가위 역시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고, 또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오늘날에도 역시 크고 작은 여러 가지 형태의 가위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 사용하는 원리에는 다를 것이 없다. 그것은 아마 가위 그 자체에 담겨 있는 원리가 매우 단순하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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