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내 삶의 시작과 끝' 예술혼 불태우다

▲ '연' '향' '저문날 허공에' 등 무대 공연때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열연했던 김소라 교수.
"내게 있어 춤은 삶의 시작과 함께 였다"며 자신있게 말하던 그가 죽음을 맞이했다. '춤은 왜, 무엇 때문에 추는가?'를 자문하며 끊임없이 창작열을 불태운 김소라 교수(법명 현아·54, 대구교당). 그는 백혈병(혈액암)으로 8월1일 이 세상과 이별했다.

4일 대구교당에서 진행된 김 교수의 5재에 참석해 그의 제자들과 예술 세계를 추모했다.

그를 따르던 대구 카톨릭대 무용학과 제자들은 "교수님의 열정을 닮은 뜨거운 여름날에 우리 곁을 떠나가셨다"며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 되어 우리들의 가슴 속에 가득 번져 마음 속 깊이 영원히 남아 있을 것이다"고 위로했다.

대구교당 노명수 교도는 추모시를 통해 "영원히 춤추는 소녀여, 할 일이 많은 이곳으로, 사랑스런 그 모습 그대로 어서 다녀오소서"라고 슬퍼했다.

이생 떠나는 춤꾼

어린 시절, 그는 춤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빠져 들었다. 그러다 어렴풋이 춤을 깨닫기 시작하면서 부터 더욱 버릴 수 없는 것이 됐다. 그는 춤이 생활의 전부였고 생활이 춤의 전부였다. 이를 증명하기라도 한 듯 그는 결혼도 하지 않고 한 평생 춤을 연인 삼았다.
그가 백혈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는 완치될 수 있다고 믿었다.

1년 6개월 동안 서울과 대구를 오가며 치료를 쉬지 않았다. 항암치료도 7번. 그 고통 속에서도 그는 공연을 기획하는 열정파였다.
7월9일 그는 제자들과 함께 '즉흥 춤-프로젝트'를 발표했다.

김지윤 제자는 "교수님이 아픔의 고통을 잊고 이번 공연을 마지막으로 준비 하셨다 생각하니 마음이 아프다"며 "뿌리를 잊지 말라는 가르침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고 말했다. 늘 근원에 반조하는 삶을 제자들에게 깨우치게 했던 그였다.

최상렬 제자는 "이제야 교수님의 마음이 헤아려 진다"며 "졸업 후 사회 활동을 하며 많은 지원을 해 드리고 싶었는데 기다려 주지 않고 우리 곁을 떠나가셔서 안타까울 뿐이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생의 자유롭고 멋있는 삶을 염원했다.
그의 예술혼을 사랑하는 제자들은 "우리에게 엄마 같은 친근함으로 모든 것을 주고 싶어 했다"고 기억한다.

강수민 제자는 "교수님은 MT 때도 꼭 선물을 준비 해 오셨다"며 "당신이 갖고 있던 물건 중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포장해서 나눠 주셨다"고 말했다.
제자들을 아낌없이 사랑하는 순수한 교육자, 참 스승이었다고 제자들은 입을 모았다.

김 교수의 첫 제자 최영미 씨는 "교수님을 이렇게 보내드려 참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며 "다음 생에는 고통이 없고, 스트레스도 없는 곳에서 작품 활동을 맘껏 하면서 꿈을 펼쳐가길 염원한다"고 말했다.

그의 춤 스승인 어머니 최현진 교도는 "골수 이식도 잘 되어 완쾌할 날만을 기다렸는데 이렇게 딸을 먼저 보내고 나니 가슴이 텅 비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경황이 없다"고 말했다.

최 교도는 "한 달은 집에서 요양하고 한 달은 병원에서 치료하며 많이 좋아졌는데, 2~3일 열이 심하게 나더니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없이 우리 곁을 떠났다"고 슬퍼했다.

어머니가 말하는 딸, 김 소라 교수는 스케일이 컸다고. 어떤 일을 하다가도 일이 지지부진하면 집착하기 보다는 뚝 끊고 새롭게 시작하는 성격이란다. 그의 아픔과 열반 역시도 그의 성격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하다. '다녀오겠다'는 이 생의 최후 공연이 아니었을까.

그는 영남일보에 연재한 '과정'이란 칼럼에서 "인생을 마감하는 날 위대한 그 무엇이 되어 있지는 못할 지라도 자신이 하는 작은 일이 우리사회 전체에 도움이 된다는 생각으로 오늘, 이 순간에 최선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는 자세를 무엇보다 소중하게 여겼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다. 가슴으로 행하는 삶과 예술의 일치를 강조한 것이다. 그의 인생관이 그대로 전해온다.

그는 '예술교육'에 대해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가르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하며 그러할 때 영혼의 맥박이 다시 뛰게 될 것이다"고 조언하고 있다.
예술인으로 무장된 신념에 찬 그의 정신세계를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소태산대종사 십상 원무 선보여

그는 무용을 전공한 교도로 원불교 문화계에 남 먼저 앞장서서 일원문화 창달에 최선을 다했다.
2000년 6월 성주성지 대각전 및 기념시설 봉불식에서도 축하공연을 한 그는 "정산종사님을 생각하며 구도하는 심경으로 안무를 기획 해 올렸다"며 "춤은 우주의 울림으로 나와야 한다"고 창작의 긴 고뇌를 말했다.

그는 '원불교춤연구회(가칭)' 발족에도 애정이 많았다. 그는 "춤의 주제와 춤사위 연구, 무용 음악, 의상, 기획 등 원불교 특유의 춤 문화와 종교무용이 독창적이면서 예술적 보편성을 띤 차원 높은 신앙 행위로 교화에 한 몫을 해 내고 싶다"는 열망을 말했다.

그러한 열망으로 2007년 5월 무용과 합창이 어우리진 감동의 무대를 선보였다. '대종사 십상에 의한 원무'를 창작, 김소라 무용단원들이 서울원음합창단 21회 정기연주회에서 협연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합창제의 틀을 깬 것이다. 주로 듣는 무대에서 보는 무대로 시각의 지평을 연 것이다.

당시 관람객들은 "무용과 합창의 아름다운 조화로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된 공연이었다"고 평가했다. 김 교수의 일원문화 창달의 꿈이 소태산대종사의 성스러운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교화형태에 대해서도 "원불교의 정적인 교화 형태는 이제 동적인 교화 형태로 변화를 가져와야 한다"며 "그 기저에 무용은 다양한 교화를 시도할 수 있는 한 장르가 될 수 있다"고 교단적 관심을 호소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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