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훈 교도
    남산교당(논설위원)
지루한 연극이나 영화를 보게 될 때의 실망감은 크다. 그러나 보는 사람의 해석과 시각을 달리 하면 얼마든지 그 실망을 희열로 바꿀 수 있다. 그 이유는 배우가 아무리 어눌하더라도, 연극이 아무리 재미없더라도, 그 연극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분석하면 굉장히 많은 것을 배우고, 감동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연극을 객관적이거나 남이 설정한 잣대로만 감상을 하는 틀을 벗어나, 자기 자신의 삶을 토대로 그 연극에서 필요한 것을 집어 와, 자기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혜를 가지면 아무리 형편없다는 연극에서도 재미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나름대로 연극 전체를 분석하고 재구성하고, 배우의 연기도 하나하나 떼어서 보면 흥미와 감동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따라서 영화를 보든 다른 일을 하든, 이 원리를 적용하면 언제나 즐거운 감상이 가능하게 된다. 이는 상대를 따지기 전에 내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값어치가 결정되고 달라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로 오면 이것이 혼란을 겪는다. 아무리 해석을 잘 하고 감동을 받아도 현실에서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현실을 아무리 잘 이해하고 노력해도 꼭 좋은 결과나 감동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는 처절한 참패의 결과가 더 많다.

교화를 위한 수많은 연구와 해석과 시도가 있지만 현실적인 좋은 결과는 아직 많아 보이지 않는다. 어떤 시각으로 좋은 계획을 세우고 발표를 해도 현실적 결과는 없을 수 밖에 없다고 본다. 이론과 현실이 다른 것 중, 중요한 한 가지는 바로 결과의 유무라 본다. 연구와 계획은 이론의 영역에 불과해서 현실적인 결과는 없다. 반대로 현실에서는 좋은 결과이던 나쁜 결과이던 그 결과가 현실로 100% 나타난다. 희비가 상전하고, 냉혹한 실감 속에 나타난, 현실적 결과를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인생과 역사는 항상 이렇게 진행되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이렇게 반복할 것이다. 원불교 교단사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

이론은 결과가 없고 현실에만 결과가 있다는 뜻은 투자계획을 아무리 정교하게 세우고 검토를 해도 이익과 손해라는 현실적 결과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현실이란 실제로 돈을 투자하면 일정기간 후에 그 손익의 결과가 반드시 현실에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공부와 연구는 그 연구대상의 현실적 결과가 없다는 뜻이다. 수많은 훈련과 연구와 수행이 있으나 실천되지 않는 공염불에 그친다면 현실적 결과는 없다. 이론의 범주에 머문 결과이다. 땅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늘 위에 맴도는 관념의 유희에 불과하다.

문제에 대한 회의를 할 것이 아니라 문제에 대한 해결을 실천해야 현실이 된다. 생각으로만 해결할 것이 아니라 현장에 나가서 작은 것 하나라도 땀 흘리며 힘을 들이는 실천이 필요하다. 교화를 위해, 수행을 위해 말보다 실천이다. 옆의 사람이 그 결과를 현실적으로 인식할 수 있게 우리가 실천하고, 그 현실적 결과를 기준으로 고칠 것은 고치고, 좋은 것은 북돋우면, 현실은 계속 나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좋은 실천이란 것이 왜 잘 되지 않을까? 그 이유 또한 간단하다. 모두 남이 하길 기다리기 때문이요, 나는 항상 예외라는 것이다. 못하는 것은 모두 타인이다. 모든 발언의 시작과 근저에는 난 항상 잘 하고, 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는 왜 문제가 발생하고 결과는 개선되지 않을까? 나를 제외한 너 때문이라는 착각이 문제다. 네가 잘못 하니 일이 잘 될 리가 없다는 생각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개선책이라는 것이 나에 대한 개선이 아니고 모두 너에 대한 개선책이다. 개선책자는 수도 없이 많다. 그러나 현실은 개선되지 않는다. 이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제 내가 실천할 수 있는 것으로 바꾸면 해결책은 단 한 줄도 벅차게 된다. 한 마디의 말도 현실에서 증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제 말이 무서워진다.

연극 감상과 현실적인 실천을 착각하지 말고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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