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힘으로 백성의 짐 덜어

▲ 현대식 물레방아.
물레방아의 기원에 대해서는 확실치는 않으나 고려 중엽부터 수동식에 가까운 물레를 사용한 기록이 있다. 이는 중국의 물레방아 방식과 비슷한 인력이 많이 드는 물레방아였다. 자전적인 물레방아는 세종에 들어 일본식 물레방아의 도입으로 인해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이예의 〈사명〉이라는 책에 의하면 박서생과 이예의 1428년(세종10년) 일본으로의 사행을 통해 일본의 자전 물레방아가 도입됐다. 사절단은 물의 흐름을 이용해 자전하는 일본의 물레방아가 논에 물을 대는 모습을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았다.

당시 중국의 물레방아는 조선에 비해 더 우수한 편이었는데 중국의 물레방아 역시 자전하지는 않고 인력을 이용해 움직인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세종 11년 일본으로의 사행에서 귀국해 일본국왕의 국서를 임금께 바치면서 올린 보고서에는 일본의 자전 물레방아에 대해 상세히 기록돼 있다.

사절단은 일본의 물레방아가 조선의 재래식 물레방아나 중국의 물레방아 보다 우수하니 이를 조선에 도입해 관개에 이용하자고 세종에게 건의하게 된다. 세종은 사절단의 건의를 받아들여 공장들을 각도에 파견하여 일본식 자전물레방아를 제작하여 사용하도록 명했다.

1431년(세종13년)에 안순은 "왜의 수차와 오치선이 만든 수차를 시험해보니 왜의 수차는 논에 물을 대는데 쓸 수 있고, 오치선이 만든 수차는 우물물을 끌어 올리는 데는 쓸 수 있어도 논에 물을 대는 데는 쓸 수 없습니다. 왜의 수차는 농사짓는데 매우 편리하고 유익하니 청 하건데 공장을 여러 도에 두어 만들어 쓰게 하소서" 하니 세종은 "힘든 백성의 짐을 덜어주는 것도 마땅히 군주가 해야 할 일 더욱더 편리한 수차를 만들어 널리 보급하라"고 했다. 이리하여 물레방아의 발전은 가속화됐고, 이후 많은 공장들이 기술을 익혀 전국에 보급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물레방아는 주로 수자원이 풍부한 강원도와 경상도 함양에 만들어졌으며 평야지대에는 수차를 많이 보급하였다고 전해진다. 지금까지 현존하는 물레방아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정선 백전리 물레방아로 제작된지 약 100여년이 지났다고 한다. 백전리 물레방아 주변에는 지하수가 솟아나오는 용소가 있어 물레방아를 돌리는데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고, 용소에서 나온 풍부한 물은 수로를 따라 물레방아의 구유로 떨어짐으로 회전하게 된다.

또한 현존하는 물레방아 중 강원도 실리의 물레방아와 순천, 함양의 것은 차이가 있었는데, 이는 한강 이남의 양식과 이북의 양식이 차이가 있었다.

강원도에 것은 살대가 네 개이며 나무못만을 사용하여 동체의 벌어짐의 방비를 하지 않아 사용하다가 나무가 부식하면 동체의 테두리에 나무를 대고 못을 박아 사용했다. 그러나 한강 이남지역의 양식은 나무못을 사용하고 빗장을 만들어 나무가 썩어도 동체가 벌어지지 않게 하였다. 이런 차이로 인해 한강이북의 양식을 북방식으로 명명하고 한강 이남의 양식을 남방식으로 명명했다.
물레방아는 전 세계에서 고루 사용됐지만 그 중 유럽지역이 가장 빨랐다.

고대 바빌론의 성곽의 공중정원에 설치된 높은 곳으로의 물을 공급하는 방식으로 아르키메데스의 수력기계다. 이 방식은 물레방아를 타고 올라온 물을 아르키메데스의 나사에 연결해 꼭대기까지 퍼 올리는 구조였다.

세계 각국의 물레방아들이 서로 다른 모습을 갖추고 있지만 수력의 이용과 물을 쉽게 사용하려는 기구임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오늘날 현대식 물레방아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방아를 이전보다 많이 찧고 현대물질문명을 이용하여 베어링과 철 축을 사용하면서 현재는 소수력 발전을 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물레의 수명을 길게 하기 위해 목재의 특수부위를 사용하고, 철 축을 특수 제작해 이젠 그 수명이 10년을 넘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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