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혜광 교무·원광대학교
    (논설위원)
개인과 사회에 있어서 변화되지 않아야 할 부분도 있고 변화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이 양자는 별개라기보다는 때로는 공유 지대를 갖는다.

현재 우리나라의 출산율은 OECD국가에서 최저선인 1.2명 선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인구변화가 주는 영향은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직접적으로 성직자 양성은 물론 교도수 감소도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외적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협받을 가능성이 높다.

교역자 지망생 감소 문제는 교단의 미래와 직결되는 과제임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응하는 방식의 변화를 보면 어느 정도 교단의 미래를 예측하게 해준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누군가 위에서 의사결정해주기를 기다리는 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그런 배경에는 아마도 위에는 의사결정의 권위가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밑에서 위로의 변화나 횡적 교호작용을 통한 변화는 낯선 것이 사실이다. 또 누구든 변화에 따른 위험부담도 없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종교가 사회 변화를 바람직한 방향으로 선도하기를 기대하는데 반해 그렇지 못할 때이다. 지금 우리에게 절박한 변화를 요구받는 부분이 있다면 무엇보다도 '인재'의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어떤 모종의 변화를 이끌 것인가이다. 그것은 출가에만 국한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교단조직에 있어 인적 자원은 마치 인체의 혈류에 비유될 수 있다. 혈류가 막히면 부패하는 것처럼 교단 조직도 인적 자원의 원활한 교체는 생명력을 불어 넣어 준다.

소태산대종사 재세 시에는 오히려 교단이 사회를 선도하고도 남았다고 배웠다. 외부 감사를 자청해서 받아도 당당하다 못해 오히려 그들이 감화를 받고 가기도 했고 의례도 시대를 앞섰다. 소통의 상징이었던 '공사(公事)'문화가 형식이 아닌 진정성을 담지하여 구성원의 자긍심과 단결을 한껏 높여 주고도 남았다. 열악한 초기 교단에서도 이런 모습이 가능했던 것은 역시 그럴만한 인적 자원이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엄밀히 말하면 제도도 인간이 만든 것에 불과하지 않는가? 교법의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는 한갓 표어로만 남아서는 안 된다. 시대는 이미 디지털 시대로 변했는데 익숙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사람을 불러 모으려고 하지는 않는지.

지금 자본주의 사회에서 호흡하면서 자본재인 재화며, 심지어 문화, 의사결정의 힘이 자본재로 치환되는 것을 어떻게 수용할까. 인적 자원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교단에 인적 자원의 유입 통로가 열려야 한다.

사람이 들어와 호흡하고 삶을 기탁할만한 최저한도의 인프라 구축은 절실하다. 만일 청빈과 빈곤을 혼동하고 무지를 번뇌의 해방으로 등식화하며 노후에 병고를 개인의 인과응보로 치환하는데 익숙해지면 인재가 들어오는 길목은 좁아진다. 두 번째로 검토해보아야 하는 부분은 제도의 유연성이다. 경직된 공동체주의는 실효 만기 선언을 강요받고 있다. 대종사 재세 시에 이미 제시한 미래 교단의 밑그림을 상기해보자. 재가출가 차별을 불식하고 오로지 공부와 사업만으로, 출가도 전통적 종교 성직자와 같이 시주동령에 의존하지 말고 여건에 따라 직업을 가질 것을 부촉하셨다. 전통은 단순한 과거와의 대화가 아니라 시대와 호흡하면서 형성되는 것이다.

새 시대 종교로서 무엇인가 이 시대와 미래의 인류 삶에 희망과 긍정의 메시지가 되려면 기성 종교를 넘어서는 변화의 지혜가 요구된다. 교단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지금 그리고 앞으로 교단에 유입되는 인재를 보면 어느 정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경직된 제도로는 인재 유입에 한계가 있다. 지자본위 외에 경직된 제도를 유연하게 하면 유능한 인재가 교단에 유입되어 마음껏 교역에 혼신의 열과 성을 다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종교 제도도 변화해야 할 부분이 있다면 변화 가능한 유연성을 가질 때 비로소 그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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