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옥녀봉 구간도실

▲ 황상운 그림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에 모인 제자들의 표정이 대단히 밝다.
방 한가운데 상이 놓이고 그 위에 맑은 물 한 동이가 올라 앉는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 앞에서는 조금이나마 아쉬움이 있기 마련인데, 그대들의 밝고 맑은 얼굴을 보니 기쁘기 한량없소."

"생사의 빠르고 늦음은 누구나 있는 것이지요. 이 어렵고 큰일에 뽑혔으니 기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과연 그대들은 하늘이 이 세상에 보낸 사람들이오. 진리의 뜻으로 이 자리가 마련된 것이 틀림없소."

그들 앞에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적힌 흰 종이가 놓여진다. 흰 종이는 최후의 증서다. 그 종이 위에 차례로 엄지를 꾹 눌러 인주 없는 손도장을 찍는다.

맨 손가락으로 도장을 찍어 그 자국이 보이지는 않는다. 손가락 자국이 겹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각자 다른 곳에다 뜻을 표시한다.

"하늘님이시여! 저희들의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9인 제자들은 그 증서를 상위에 올린 다음 일제히 엎드려 결사의 뜻을 하늘에 고한다.

제자들이 고개를 들었을 때 스승은 증서를 들여다 본다.
"아! 저, 저 붉은 빛…."

상위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현상에 신음 섞인 탄성이 흐른다.
모두 숨을 죽이고 흰 종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데, 아홉 개의 손가락 자국이 선명한 핏빛으로 선명하게 떠오른다.

"아, 내 손가락이다!"
모두 다 자기 손가락을 확인한다.

인주를 묻힌 적이 없는 손도장이 흰 종이에 핏빛의 손가락 자국을 드러내는 기적을 나투고 있는 것이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문둥병이 깨끗이 낫는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그대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이 하늘에 이르렀도다. 그대들의 기도의 정성이 진리로서 판결났도다!"
박중빈이 제자들을 불러 앉히고는 백지혈인의 큰 뜻을 진리로서 선언한다.

구수산 아홉 봉에 촛불기도 연꽃 피우고
단도 품은 사무여한 백지혈인 나투었네.

법계의 인증이어라. 억조창생 춤을 추네.
환희의 노래가 구간도실 문밖을 나와 드넓은 하늘로 날아가고 있다.

제자들은 환희의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스승의 엄숙했던 표정이 자애로운 미소가 되어 동산에 떠오르는 햇님이 된다.

"이제 그대들은 어제의 몸이 아니오. 오늘의 마음을 영원히 간직하고 공부와 사업에 열중하여 우리의 뜻을 널리 펴도록 해주시오. 그대들의 전날의 이름은 세속의 이름인 바 새 세상에 널리 쓰일 새 이름을 내려주겠소."

법호와 법명을 받은 아홉 제자의 얼굴은 달처럼 환하고 두 눈이 별처럼 반짝인다.
그들은 죽음의 자각을 통해 순교의 정신을 배웠고 비로소 그들이 펴고자 하는 신앙의 주체를 찾은 것이다. 이 어찌 기쁘지 않으랴.

박중빈은 1919년 11월26일 지금까지의 저축조합 이름을 불법연구회 기성조합으로 바꾸고 불법의 뜻을 연구하는 큰 목적을 이루기 위한 출발점으로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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