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육쌍전·동정일여·이사병행의 산 도량

▲ 원기28년 정관평.
▲ 원기94년 옥녀봉에서 바라본 정관평.
오늘날 물질문명은 개벽 그 이상의 세계를 구현해 나가고 있다. 물질적 가치는 자연 훼손은 물론이고 본래 자연과 더불어 상생의 관계에 있던 사상의 흐름들도 물질적 가치 앞에서 용도 폐기되고 있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하신 소태산대종사의 개벽 정신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어떤 과제가 있을 것인가 생각해 본다.

영산성지에서 초기의 역사와 건물과 지역에서 함께 호흡하고 살아가고 있는 입장에서 과연 소태산대종사는 어떤 회상을 꿈꾸었을까? 늘 고민하면서 오늘날 대두되고 있는 개발의 논리로 정관평을 바라보고 이해하는 불편함에 다시 한 번 정관평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빈곤한 마을, 길룡리

소태산대종사의 탄생지요 구도지요 대각지요 초기 교화 현장이었던 영산은 예로부터 바닷물의 내왕과 더불어 자연 재해가 자연 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고장이었다.

길용리 주위에 있는 마을들, 예를 들면 삼산종사의 고향땅인 천정리 대흥리 일대만 하더라도 옥토가 제법 규모 있는 땅에 속한다. 선진포와 이웃한 장산리는 대종경에 나오는 송덕비의 주인공 김부잣집의 예화와 관련 있는 곳이며 이 지역 또한 전답의 규모가 제법 있는 곳이다.

그러나 유독 길용리는 오랜 과거로부터 교통의 오지였다. 대각터와 선진포 등지에 있는 팽나무와 느티나무들은 오래전부터 이곳에 살던 주민들이 안녕을 빌며 당산재를 지낼 정도로 바닷물이 마을 깊이 내륙으로 들어왔던 곳이다.

그런 까닭으로 조수의 내왕과 더불어 여름이면 호랑이 눈썹바위에 있는 용암마을에서 유입되는 민물과 조우하여 자연재해가 자주 일어났었고, 바다와 가까웠던 지리적 영향으로 인하여 돌과 조개무지가 태반이라 사람들이 벌어먹고 살 제대로 된 논과 밭이 없었던 탓으로 물질적으로 빈곤의 상태를 오랜 동안 벗어날 기약이 없었다. 오죽하면 스무 살 처녀가 외지로 시집을 갈라치면 쌀 한말을 먹지 못하고 시집을 갔다 할 정도로 물질적으로는 최대의 궁핍한 세월을 보냈던 곳이다.

이런 가난한 동네에서 물질적으로 최대 빈곤의 상태에 직면한 마을 사람들과 같은 삶을 살아왔던 소태산대종사의 입장에서 이 난관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가 뒤돌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절대 빈곤의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 도에 발심하여 대각을 이룬 스물여섯 살의 소태산대종사는 과연 이 땅위에서 도덕 천하를 이루고자 하였으나 자기 일신 하나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민초들과 더불어 난관을 어떤 방법으로 타개하려고 하였을까? 절대 빈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과연 도덕을 어찌 전달할 것이며, 가난을 천형(天刑)처럼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멍에를 벗겨내고 싶었을 것이다.

무산자들을 위한 사업

민족의 격변기였고 한반도 정세는 물론 개벽 사상이 물밀듯이 한반도를 휘감고 있던 무렵, 개벽 사상을 필두로 동학과 증산에 이어 소태산대종사는 대각을 이루고 민초들과 함께 이 절대 빈곤과 가난을 물리치고자 수만 년 불고하던 바다를 막고이를 위해 구인 제자들과 더불어 금주와 금연, 보은미 저축 등을 통해 사업의 자본을 마련하였다.

당시 개간 사업을 벌였던 사업들은 대개 자본가들에 의해 투기 목적으로 이루어진 사업이었으나 소태산대종사는 무산자들의 땅에서 금주 금연, 보은미, 공동 출역과 노동을 통하여 자본을 마련하여 공사 자본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오산 박세철 선진의 아들 박계축(법명 화백)의 구술 자료는 1차 언답 막을 당시의 풍경을 그리고 있다.

"그때도 여기 포두녁까정 갯물이 들어왔으니까. 아 나 그때 15살에 종사님을 봤으니까 훤하시지. 강변주점서 놀고 그랬는디 확실하게 알제. 구언(1방언 공사) 공사할 때 종사님이 서 계시고 그때들 구언 막을 때는 봤지. 그러니까 지금 선원 밑으로(영산) 그때는 바다였으니까."

이런 간고한 살림에 방언공사를 하던 차에 이웃 부호 한 명이 땅 소유에 대한 분쟁을 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구인제자와 이웃주민들이 비분강개할 당시 소태산대종사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제자들을 달랜다.

"공사 중에 이러한 분쟁이 생긴 것은 하늘이 우리의 정성을 시험하려 하심인 듯하니, 제군은 조금도 거기에 끌리지 말고 또는 저 사람을 미워하고 원망하지도 말라. 일은 반드시 바른 대로 돌아오는 것이 이치의 당연함이어니와 설령 우리의 노력한 바가 헛되이 저 사람의 소유로 된다 할지라도 우리에 있어서는 양심에 부끄러울 바가 없으며, 또는 우리의 본의가 항상 공중을 위하여 활동하기로 하였으니 비록 처음 계획과 같이 대중을 위하여 사용하지는 못하나 그 사람도 또한 대중 중 한사람은 되는 것인즉, 다못 한 사람에게라도 그만한 이익을 주지 않는가? 이때에 있어서 제군은 자타의 관념을 초월하고 오직 공중을 위하는 생각만으로 근실히 노력할지어다 하시니, 조합원 등은 이 넓은 법설을 듣고 더욱 감탄심을 내어 공사를 여전히 진행하였더니, 그 후에 대부허가서가 다행히 본 조합으로 나게 된 바 분쟁은 드디어 사실로서 해결되고 일반 관중의 조합에 대한 신뢰도 또한 일층 깊어졌다."

내용으로 미루어 보건데 소태산대종사는 방언공사를 다분히 하나의 교단과 개인의 물질적 부의 축적의 개념으로 바라보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사에 참여한 많은 사람들이 이 방언에서 같이 농사를 지으면서 질곡(桎梏) 같았던 물질적 가난을 벗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공사가 끝난 후에 논에 모를 심었지만 염해로 인하여 원하던 결과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소금 피해가 상당 기간 지속이 되었으며 〈월말통신〉에도 몇 차례 언급될 정도였다.

방언공사를 마친 소태산대종사는 몇몇 제자들을 데리고 변산에 입산을 한다. 떠나면서도 소태산대종사는 마을 주민들의 가난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대중들과 일심 합력하여 바다를 막아 논을 만들고자 갖은 고생을 하였지만 염해로 인하여 곡식의 소출을 보지 못하고 변산으로 떠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서운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고 한다. 영산에 남은 제자들은 마을주민들과 함께 농토를 유지하고 보수하는 한편 소태산대종사의 도덕을 펴기에 이르게 된다.

시대적으로 영광 일원에 많은 간척 사업이 벌어졌지만 대개 유산자들의 부의 축적 개념과 소유의 개념으로 이루어진 사업인 반면에 소태산대종사는 무산자들의 땅에서 당시 사회적으로 보기 힘들었던 금주, 금연, 보은미 저축 등을 통해 무산자들에게 생활 습관의 개선은 물론 민초들과 함께 논을 일구고 같이 더불어 사는 상생의 정신적 이념을 직접 현실에서 함께 실현해 보인 방언공사의 실체를 몸소 펼쳐 보이신 것이다. 이에 대산종사는 방언의 대 역사로 영육쌍전, 동정일여, 이사병행하는 일원회상의 시범을 보여주신 곳이라 하였다.

<중앙총부영산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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