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그곳

외나무다리에 이르자 만도는 머뭇거리는 진수에게 등에 업히라고 하며, 진수는 지팡이와 고등어를 각각 한손에 들고 아버지의 등어리로 가서 슬그머니 업힌다. (중략) 만도는 아직 술기운이 있었으나 용케 몸을 가누고 외나무다리를 조심조심 건너가고 있으며 눈앞에 우뚝 솟은 용머리재가 이 광경을 가만히 내려다 보고 있다.

하근찬의 단편소설 〈수난이대〉에 나오는 외나무다리는 일제시대 강제징용으로 한 팔을 잃은 아버지 박만도와 6·25전쟁으로 다리를 잃은 아들 박진수의 이해와 화해의 장으로 등장한다. 한 사람도 휘청거리며 간신히 건널 수 있는 위태로운 공간이지만 이는 역으로 서로를 의지해 역경을 극복하는 화합의 공간이기도 하다. 견우직녀설화에서 까치와 까마귀가 이어주는 오작교는 사랑하는 연인의 만남의 공간이 된다. 반면 불구대천의 원수를 만나는 외나무다리는 피해갈 수 없는 운명의 장소가 되기도 한다. 이처럼 다리는 계곡이나 강, 해협 등을 넘어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매개체로써 있어왔다.

먼 옛날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설화로부터 '퐁네프의 연인들'과 같은 오늘날의 영화에 이르기까지 다리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생산되는 것 역시 다리의 기능적 요소 뿐 아니라 사람들의 만남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다리의 시작

예부터 인간은 생활의 편리함을 꾀하고자 다리를 놓았는데 그 시작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인류가 정착생활을 시작한 신석기 시대부터 사용된 것으로 보여진다. 한 곳에 정착해 지내다 보면 주거지 주변에 장애물이 있기 마련인데 이로 인한 불편을 덜기 위해 주변의 돌을 띄엄 띄엄 놓은 징검다리나 통나무를 걸쳐 놓은 것이 그 시작이라고 추측된다.

우리의 경우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실성이사금조'에 평양주대교에 대한 기록이 있고, 역시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조'는 498년 웅진교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삼국시대에 상당한 규모의 다리가 놓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리들은 모두 목재로 만들어져 지금은 그 형태를 찾을 길이 없고, 통일신라기(751년)의 불국사 전면 자하문에 이르는 청운교와 백운교, 안양문에 이르는 연화교와 칠보교가 가장 오래된 다리로 현존하고 있다.

이 밖에도 고구려 왕궁인 안학궁 앞쪽에서 발견된 대동강 다리 터는 오늘날 평양의 대성구역 청호동과 사동구역 휴암동을 연결시켰던 것으로 다리규모는 길이가 375m에 폭이 9m에 달할 것으로 보여진다.

다리의 재료

다리는 그 재료에 따라 흙다리와 나무다리, 돌다리 등으로 구분 할 수 있는데 흙다리는 나무로 된 구조체에 통행의 편의를 위해 교면에 뗏장을 얹어 나무 사이로 발이 빠지지 않게 한 다리를 말한다. 흙다리의 경우 그 구조가 튼튼하지 못해 여름에 강수량이 집중되는 기후적 특성으로 매년 다리를 다시 놓아야 하는 불편함이 따랐다.

나무다리는 낮은 내구성으로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경우가 드물지만 가공이 쉽고 재료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의 특성상 가장 널리 사용되었다. 또 가공성이 좋아 다양한 형태의 다리 모습을 보여주는데 외나무다리로부터 널다리, 회랑과 같이 건물과 건물 사이를 잇는 형식과 누각을 설치한 누교도 있다. 다만 흙다리와 마찬가지로 다리의 아랫부분은 항상 물과 접촉해 몇 해를 넘기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와 달리 돌다리는 강한 내구성을 자랑하는데 석재가 풍부한 우리나라는 돌다리의 가설 여건이 비교적 좋은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공력이 많이 드는 단점이 있어 온 마을사람이 합심해 놓거나 독지가의 특별한 노력이 있어야 놓을 수 있었다. 오늘날 현존하는 다리 앞에 독지가의 특별 노력을 기리는 송덕비가 많이 남아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재료에 따른 다리의 형태

그런데 다리의 재료와 형식 사이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다. 재료의 특성을 효과적으로 살리기 위해서는 그에 다른 알맞은 구조와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무다리는 인장 강도가 큰 장점을, 돌다리는 압축강도가 큰 장점이 다리의 형태에 고스란이 나타나게 된다. 가장 간단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 널다리는 목재와 석재 등 재료에 관계없이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고 있는데 외나무다리로부터 시작해 하천 가운데 교각을 세우는 다경간 다리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돌다리의 경우 널다리 형식과 홍교 식으로 가설되었지만 흙다리와 나무다리는 널다리 형식뿐이었다. 널다리의 경우 간단한 구조로 널리 사용됐지만 구조상 구름다리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성이 떨어져 구름다리에 비해 남아 있는 숫자가 적은 편이다.

구름다리가 안정적 축조형식 임에도 불구하고 많이 축조되지 않은 것은 공력이 많이 들어가기 때문인데 민간 지역에서 주로 널다리가 사용되고 궁궐의 주요 다리나 사찰에서 구름다리가 널리 사용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또한 조형미가 뛰어난 구름다리는 불교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실제로 앞에 언급된 불국사의 다리들은 석계를 받치기 위한 돌다리들인데 청운교와 백운교는 33계단으로 불교에서 말하는 삼십삼천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밖에도 다리 위에 누각이 있는 누교는 옛 다리에서만 보이는 독특한 형식이므로 다리의 연결 기능과 정자의 역할을 겸하게 되어 있다. 백제 무왕 때 조성된 익산 미륵사 터의 다리도 이와 같은 형식이다.

누교는 윗부분에 누각 건물이 걸쳐 있어 나무다리로는 지탱하기 곤란해 자연히 안정된 석조 홍예교 위에 설치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능파각 목교의 경우 단칸 다리로 무게를 양쪽의 석축 교대가 받을 수 있어 목교로 된 경우도 있다.

잔교라 불리는 매단 다리 역시 오늘날에는 찾아보기 힘든 다리의 형태인데 오늘날 교각 사이의 간격이 긴 현수교의 옛 형태라 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