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훈 교도·물금교당(논설위원)
매사는 진정성이 있어야 성공한다. 교화도 마찬가지이다. 국가는 국민을 위한 정책과 자금지원, 세제지원 등 다각도의 경제발전을 위한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좋은 일이고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일정 단계의 경제수준을 넘어서면 오히려 간섭의 단계가 된다. 기업이 알아서 판단해서, 위험을 감수하고 고객의 만족을 통한 생존의 촉각을 곧두세우고 치열한 시장환경에서 고군분투하는 것이 현실이다. 여기에 정부의 어설픈 시책은 기업 각각의 고유의 입장에 맞는 정부서비스를 제공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반대로 기업이 원하는 행정적 요구는 오히려 어려움이 많다. 각종 민원 요구나 기업이 필요한 세부 지원을 요청하면 안 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이율배반적이지 않는가? 해라 할 때는 언제고 안된다는 것은 언제인가? 진정성을 생각해보자.

교화를 위한 많은 시도와 계획은 난무하고 있다. 한 교도가 정말 필요로 하는 것을 요구할 때 어느 정도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서비스를 교단은 제공하고 있는가? 하향식의 교육과 명령 하달형의 계획 아래 이루어지는 행사에 쏟는 시간과 에너지는 많은데 정녕 그 효과는 미미한 것으로 비친다. 반면에 교도 한 사람 한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양하고 절실하다. 거시적인 교화보다 가장 가까이 있는 교도의 아픔과 고통을 헤아려 파악하고 이를 해결하는 작업이 교화의 활성화를 위해 절실하다.

교당내 교도, 교구내 교도, 잠재 교도, 다문화 교도 등 교도라는 단어도 실제 현실에서는 무수히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이에 걸맞는 교화와 위로가 선행된다면 인생의 고통에서 벗어나 진리의 대도에 근접하는 화합의 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교단 어디를 물어봐도 틀리고 잘못되는 것은 하나도 없고 순리자연한 방법이 있다는데 가까이서 느끼는 분위기는 왜 그렇지 않고 몸으로 그걸 느낄 수 없는 걸까? 나의 인식이 잘못된 것일까?

전체적인 슬로건과 현실적인 밑바탕에서의 체험이 다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진정성의 의미로 해결할 수 있다. 사랑이란 '말'이 아니라 상대가 서로 '체험'을 통해 공유해야 수긍하고 받아들인다. 항시 상대라는 것은 갑과 을의 형식을 띠게 되고, 한 사람이 리더하고 한 사람은 이를 받아들여 수용해야 관계가 지속되고 메시지가 전달된다. 일방적인 강요는 진리에 대한 이해에서도 오해와 거부감을 낳는다. 우월적 지위를 활용해서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선택을 요구하는 것은 원래 목적의 진정성에 부합되지 않는다. 대종사님이 원하는 재생의세의 진정성을 생각해 보자.

진리는 상하도 없고 갑과 을도 없는 세계일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모두를 초월하는 데서 이루어지리라. 현실에는 계급과 직위가 있지만 일이 이루어지는 원리에는 없어야 한다. 진정한 정도의 길과 자세를 다듬는다면 100년의 교화는 더 활창하게 퍼져나갈 것이다.

독단, 독선, 아집, 배타성은 진정성을 멀게 하는 요소이다. 조직 전체에 영향을 주고 조직의 유연성을 떨어뜨린다. 실패하는 기업과 조직은 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다. 다 알고 있으면서도 실행하지 않는 결과이다. 실행에 방해되는 것이 독선과 아집이다. 이는 진정성과 거리가 먼 간섭의 단계로 접근한다. 최근 경쟁에서 몰락하는 조직체를 많이 본다. G20을 통해 세계의 대가들이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는 경제발전단계에서, 필연적으로 시장에서 사라지는 기업이 속출하는 치열한 경쟁단계라는 이면도 보아야 한다. 글로벌한 차원에서의 성장과 발전 방안도 중요하다. 또한 성숙단계를 지나 쇠퇴기에서의 자세와 그 원인을 찾아보는 노력도 중요하다고 본다.

성공과 실패는 지식의 유무보다 사랑의 유무가 작동하는 진정성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진정한 사랑은 간섭일 수 없다. 정부와 국민, 교단과 교도, 스승과 제자,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간섭이 아닌 진정성이 살아있는 관계로 G20의 시대를 맞이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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