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회수행 통한 자유롭고 행복한 삶

▲ 강해윤 교무서울교구 은혜의집
배우 전도연에게 큰 상을 안겨 주었던 영화 '밀양'에서 신애(전도연)는 자신의 하나 밖에 없는 삶의 유일한 의미였던 아들 준이를 유괴범에게 잃고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교회를 나가자는 권유를 따라 종교 활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자신의 아들을 죽인 살인범을 용서하기 위해 교도소를 찾아가 면회하게 되었는데 그 살인범은 교묘한 웃음을 띠며 말합니다.

"하나님 믿고 회개하고 용서 받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그만 충격을 받아 실신하게 됩니다. 그 후 그녀는 신을 모독하기 위해 저항합니다. 이 영화는 '사랑'과 '용서'를 주제로 하고 있지만 저는 그 반대편에 있는 살인범의 회개에 대해 생각 해 보았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고 잘못을 하였을 때, 신을 믿고 회개하며 용서를 빌면 신께서는 용서를 해 주고 우리의 죄는 모두 사라지는 것일까요? 이러한 의문을 갖고 오늘은 죄업과 참회에 대해 공부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대자비심으로 참회문을 열어 놓으시고 죄업으로부터 자유로운 진정한 참회의 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은 몸과 마음을 쉼 없이 작용하며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삶의 징표이며 생명 현상입니다. 이러한 심신 작용을 통해 생겨나는 작업의 결과는 업이라는 개념으로 존재합니다. 존재한다고 표현하니 과연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이미 사라지고 만 기억일 뿐일까요?

디지털 정보를 저장하는 매체인 디스크나 메모리칩 등에 기록된 내용은 플레이어를 만나면 재생되지만 기록되어 있는 모습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것처럼 순환무궁한 우주의 진리를 따라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는 기록 방식으로 업은 저장되었다가 인연을 따라 발현됩니다. 이에 대한 결과가 지금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에 믿지 않을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러한 심신작용으로 생겨나는 업은 선업이 되었건 악업이 되었건 쌓여만 가고 점점 힘을 얻게 됩니다. 그리하여 업력이 되고 업장이 되며 업보가 되어 우리가 피할 수 없이 받아야 하는 과보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인과의 법칙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는 참회할 게 없다'고, 그런가 하면 어떤 분들은 매일 매일 참회로 수행정진 합니다. 우리가 참회 수행을 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로워 질 수 없을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교화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보면 그들 각자가 갖고 있는 사연만큼이나 죄의식도 제 각각 차이가 있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바라보기 보다는 억울함에 원망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도 있고, 자신의 지난날을 돌아보며 깊이 참회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그곳에서의 참회는 절실하게 다가옵니다.

교도소의 담장이 합법과 탈법을 구분하는 선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담장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몸이 자유롭다고 참회도 소용없는 것은 결코 아니며 우리 인간이 몸과 마음을 갖고 있는 이상 참회를 통해 자신을 비워내고 또 비워내야만 영원한 자유를 얻고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업은 본래 무명, 죄업의 근본 탐진치

선업 쌓고, 죄업 경하게 알지말라

진정한 참회수도-깨달음 통해 마음 자유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죄는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하시고 '업은 본래 무명이며, 죄업의 근본은 탐·진·치'라 하셨습니다.
죄의 출발점은 마음입니다. 우선 마음이 고요한 상태가 되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없어야 하는데 이미 한 마음이 일어나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쌓여 버리면 그 습관을 따라 죄업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청소년 쉼터에 온 아이들 중에는 잠시도 참지 못하고 남의 물건을 훔치려는 청소년이 있습니다. 흔히 도벽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병적 증상을 가진 아이들은 남의 것을 훔치는 마음에 죄의식이 없습니다. 그래서 금방 다짐을 하고 약속을 해 놓고도 다시 훔치기를 반복합니다. 욕심나는 마음이 한번 들어지면 그것을 벗어나기 어려운 업력이 끌어당깁니다. 그러니 최초 한 마음이 일어나지 않도록 호기심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일시적 참회로써 약간의 복을 짓는다 할지라도 원래의 탐·진·치를 그대로 두고 보면 죄는 죄대로 복은 복대로 남아 있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사건이 발생하여 후회의 눈물을 흘리며 죄 값으로 치르는 복 짓기는 결코 죄업을 소멸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참회는 마음에 있는 탐·진·치가 소멸되어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영화의 내용처럼 일시적 참회로 자신의 죄업이 소멸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일 뿐이며 회개와 참회를 왜곡하는 사람들의 착각입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밖으로 선업을 쌓고 안으로 탐·진·치를 제거하는 이참과 사참을 함께 하라' 하셨습니다. 마음에서 비워 내야 할 것은 탐·진·치이며 몸으로 쌓아 나가야 하는 것은 선업입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으면서 복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으며, 마음을 비우지 않고 깨달음으로 갈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좋은 음악을 듣기 위해 깨끗하게 포맷된 저장매체에 고품질의 음악 정보를 기록하고 온전한 플레이어로 재생하는 것과 같이 오늘 우리 삶이 기록되는 내 마음의 바탕을 깨끗이 비워서 아름다운 선업을 쌓아 기록하면 시절의 인연을 따라 아름다운 삶으로 발현 될 것입니다.

소태산대종사께서는 '진정한 참회 수도로 깨달음을 통한 마음의 자유를 얻어야 천업을 임의로 하고 생사에 자유 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우리의 최종 목적은 깨달음을 통한 완전한 자유입니다. 삶에도 구속되지 않고 죽음에도 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쌓여만 가는 죄업을 덜어내는 수행 즉 참회이기 때문에 진정한 참회 수행은 현재의 자신을 자유롭고 행복하게 하는 길입니다.

마지막으로 소태산대종사께서는 '부처의 말씀을 오해하지 말고 죄업을 경하게 알지 말라'는 경고의 말씀도 하셨으니 겸손한 태도로 공부하면서 우리 모두 매일매일 참회수행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비우며 선업을 쌓아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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